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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의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414
한자 壬亂義兵
영어음역 Imnan Uibyeong
영어의미역 Righteous Army of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정진영

[정의]

1592년 임진왜란 초기 왜군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안동 지역의 지방 유생과 향촌민이 조직한 민병.

[발생 배경]

경상도 전역에 왜군의 침략 사실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지방 수령은 도주하고, 백성들은 피난을 떠나기 시작하였다. 지방 수령들의 도망은 임진왜란 초기의 패배 원인으로 흔히 지적되는 당쟁과, 이로 인하여 대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점, 또는 적의 최신식 무기인 조총 때문이라는 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은 국가 기강의 문란과 지방 수령들의 폭정에서 오는 민심의 이반 때문이었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왜군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대역사는 도리어 백성들의 삶을 더욱 도탄에 빠지게 하였는데, 특히 이것은 영남 지역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농민들은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왜군의 침략을 받자 적의 향도(嚮導)가 되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관군의 패전은 이렇듯 민심의 이반에서 오는 것이었다. 따라서 수령을 중심으로 한 왜군에 대한 항쟁은 불가능하였다. 왜군의 분탕과 살육, 백성들의 토적(土賊) 활동에 직면한 지방의 유생들은 이제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 그들 스스로가 적극적인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이 바로 의병의 활동으로 구체화되고 있었다. 여기에 경상도초유사로 활동하고 있던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창의격문(倡義檄文)과 의병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은 경상우도에서 의병 활동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였다.

[의병의 조직과 전술·전략]

의병의 지도층은 전직 관리 또는 유생 등 양반 계층이었다. 이들은 일찍부터 자치적 조직체인 유향소를 중심으로 지역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양반의 지역 지배가 전쟁을 통하여 그대로 존속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양반 상호 간에는 종래 향촌 지배의 조직이 강한 결속력을 제공해 주었다. 따라서 지방의 명망 높은 양반의 창도에 따라 주위의 많은 양반들이 호응하였던 것이다.

결국 의병은 지방의 대표적인 양반 계층에 의해 조직되었고, 또한 이들의 수많은 노비와 막대한 곡물이 의병의 인적·물적 바탕이 되었다. 또한 이들은 수령과 관군이 버리고 간 무기와 곡식을 취하여 무장하고 군량미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영남의 의병 부대는 각기 그들의 거주 지역에서 왜군의 침입로와 그들의 거점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영남을 관통하는 낙동강은 왜군의 중요한 보급로일 뿐만 아니라 약탈품을 수송하는 길이기도 하였으므로 의병들의 활동 역시 낙동강 연변에 집중되어 정인홍의 의병은 낙동강 상류에서, 곽재우의 의병은 김해·의령을 중심으로 한 낙동강 하류에서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의병의 전술은 요새지에 매복하였다가 왜군이 이르면 갑자기 활을 쏘거나 공격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전술은 소규모의 부대가 대규모의 정예 부대를 맞이하여 대응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지만, 이 방법은 근본적으로 민중의 적극적인 지지와 호응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민중과 함께한 영남 각지의 의병 활동은 결국 왜군의 전방으로의 전쟁 물자 수송도 호남으로의 진출도 허락하지 않았다. 따라서 평양과 함경도까지 석권한 왜군의 활동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안동의 임란의병]

안동은 왜군의 침입로에서 벗어나 있음으로써 침략의 피해를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다. 그러나 성주(城主)와 부민(府民)들 모두가 성을 버리고 도망한 상태였다. 1592년(선조 25) 4월 25일 상주를 함락한 왜군은 인근 지역에 출몰하였다. 6월 말부터 7월 초에는 안동과 예안까지 들어왔는데, 무리는 수십 명에 불과한 소부대였다. 이에 안동에서도 의병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어 갔다.

예안에서는 6월 11일 김해(金垓)를 의병장으로 추대하는 논의가 진전되어 금응훈(琴應壎)을 도총사(都摠使)로, 김담룡(金潭龍)·김기(金圻)를 정제장(整齊將) 등으로 삼아 기병(騎兵) 55명과 보병(步兵) 367명으로 의병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이 의병 부대는 구체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안동에서는 8월 초에 경상도초유사 김성일의 초유문이 전해지면서 의병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논의 과정을 거쳐 이정백(李庭栢)을 대장, 배용길(裵龍吉)을 부장, 김용(金涌)을 안동수성장으로 하는 의병 조직을 결성하였는데, 예안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활동을 하지는 못하였다.

안동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기에 인근 지역에서도 의병 조직이 결성되자 효과적인 활동을 위해 의병 연대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8월 20일 마침내 안동을 위시한 예안·의성·의흥·군위 등지의 사림이 일직에 모여 동맹하고 승문원정자 김해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이정백배용길을 각각 좌부장과 우부장으로 삼아 병호(兵號)를 ‘안동별읍향병(安東別邑鄕兵)’이라 하였다. 그리고 안동을 본진으로 삼아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안동별읍향병은 대오를 정비한 뒤 당교(唐橋)와 상주 지역으로 진출하여 왜군과 전투를 수행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지만, 군량미와 군기 등의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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