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12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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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書堂 |
영어음역 | Seodang |
영어의미역 | Private School for The Study of Chinese Classics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집필자 | 정진각 |
[정의]
예로부터 내려오던 경기도 안산 지역의 사설 기초 한문 교육 기관.
[개설]
서당은 사족(士族)과 일반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향촌 사회에 생활 근거를 두고 면(面)·동(洞)·이(里)를 기본 단위로 하여 설립한 초·중등 교육기관이다. 학당(學堂)·사숙(私塾)·학방(學房) 등이라고도 한다. 서당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나 삼국시대 고구려에 경당(扃堂)이라는 마을 단위의 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것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초기부터 각처에서 성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의 서당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그 수효의 증가와 교육의 질적 향상을 보이며 민중교육기관으로 발달했으며 신교육이 실시될 때까지 존속해온 가장 보편화된 교육기관이었다.
서당이 사회적으로 그 의미가 증대된 시기는 16세기 사림파의 등장 무렵이며 이때의 서당 설립 주도 세력은 대부분 당시 향촌 사회에 큰 영향력을 가졌던 명문 사족 출신의 대토지 소유자들이었다. 설립 명분은 반상(班常)의 구별을 비롯한 유학적 질서율을 향촌 사회에 정착시키려는 것이었으며 부락민들의 민간 자산에 의해 설립되었다. 17세기에도 서당은 사족이 연합하여 설립했으나 18세기에 이르러 동족부락 중심의 서당이 형성되었고, 이때부터 서당은 혈연 중심의 폐쇄적 성격으로 변하였다.
이들 서당은 사적(私的)으로 설립되며 기본 자산과 인가를 요하지 않아 개폐가 자유로웠다. 조선 말기까지 이어지던 서당은 1918년 일제의 「서당규칙」 공포로 탄압을 받으며 그 숫자가 현격히 줄어들었고, 광복 후 제정된 「교육법」에 의해 학제가 정비되면서 점차 소멸되어 오늘날에 와서는 산간벽지 등에만 드물게 존재하기도 한다.
[현황]
조선시대 안산 지역에도 많은 서당이 운영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서예가인 강징(姜澂)이 말년에 안산 양상동에 우거하며 서당을 열어 학동들을 가르쳤다하여 지금도 ‘서당골’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안산 출신으로 알려진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에 그가 낳고 자란 서해안을 중심으로 한 어촌 풍습 그림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들과 함께 전해지고 있는 「서당도(書堂圖)」는 당시 안산 지역의 한 서당을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
안산 지역의 서당으로서 단편적이나마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초당서당(草堂書堂)이다. 현 안산시 상록구 사동의 옛 양주최씨 집성촌이 있던 초당에 종학당(宗學堂)으로서 세워진 것으로 현재까지 초당 터가 남아 있으며 서당 운영에 필요했던 도서 구입 관계 문서 등도 남아 있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기에도 서당의 운영은 활발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1916년 경기도 지역의 면서기 가운데 서당에서 전통교육을 받은 인물이 337명으로 전체에 76%를 차지해 절대적인 다수를 점하고 있으며 1922년 현재 경기도 내에서 2,619개의 서당이 등록 운영된 것으로 보아 안산 지역에서도 많은 서당이 운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최영두가 안산문화원에 기증한 서당에서 사용하였던 각종 서적과 안산 지역의 훈장들이 모여 시회(詩會) 개최한 문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