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15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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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沙士洞- |
영어의미역 | Mutchibaemi in Sasa-do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
집필자 | 이현우 |
[정의]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에서 묻치배미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사사동 묻치배미」는 상록구 사사동 산78번지에 있는 이흥상(李興商)[?~1465]의 묘와 연관된 지명유래담이다. 배미는 논배미를 지칭하므로 묻치배미는 ‘묘비를 묻은 논배미’를 의미한다.
[채록/수집상황]
2004년 10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으로 현지조사를 나가 주민 배호순[남, 66]으로부터 이현우가 채록하였는데, 이는 2005년 안산문화원에서 발행한 『반월동 향리지』에 실려 있다.
[내용]
이흥상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연(子衍)이다. 음직으로 행수(行首)에 보직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에 이르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당시에 의금부진무(義禁府鎭撫)로 수양대군[世祖, 1417~1468]의 지시를 받고 김종서(金宗瑞)[1383~1453]와 아들 김승벽(金承璧)을 찾아내어 목을 베었다. 이 공으로 정난공신 3등에 책정되고 첨지중추원부사(僉知中樞院副使)에 승진되어 1454년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지고 이듬해에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훗날 세조가 죽고 난 다음 계유정난에 가담하여 김종서의 목을 벤 것이 역적이라 하여 이흥상의 묘를 찾아 해를 가하고자 하자 후손들이 묘를 감추기 위해 묘비를 끌어내 논에다 묻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다시 묘비를 찾아 세우려 했으나 찾을 수가 없어 약 140년 전 갑자년에 새 묘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흥상의 묘비를 묻었던 논을 지금도 ‘묻치배미’라고 부르고 있다.
[모티프 분석]
「사사동 묻치배미」의 주요 모티프는 ‘논에다 묻은 묘비’이다. 이흥상을 계유정난에 김종서를 벤 역적이라 지목하고 묘를 찾자 후손이 미리 묘비를 논에다 묻어서 묘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때 묘비를 묻은 논을 ‘묻치배미’라고 부른다는 지명유래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