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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487
한자 李貞敏
이칭/별칭 자정(子正),옥계(玉溪)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6년연표보기 - 이정민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0년 - 이정민 진사시 입격
활동 시기/일시 1594년 - 이정민 청난공신 녹훈, 의금부도사·감찰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19년 - 이정민 탐오 수령으로 탄핵
몰년 시기/일시 1638년연표보기 - 이정민 사망
거주|이주지 낙향지 - 충청남도 홍성군 금마면
거주|이주지 이주지 -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옥계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용인
대표 관직 의금부도사|감찰|당진현감

[정의]

만년에 충청남도 보령 지역에 정착한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이정민(李貞敏)[1556~1638]은 이몽학의 난에 공을 세운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글솜씨가 뛰어났다. 만년에 보령 청라의 옥계리에 옥계정(玉溪亭)을 짓고 정착하였다.

[가계]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자정(子正), 호는 옥계(玉溪)이다. 아버지는 홍산현감 이향성(李享成)이다.

[활동 사항]

이정민은 글솜씨로 이름이 있었는데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당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는 거주지가 한성[서울]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정민의 아버지 이향성의 묘갈명을 월사 이정구가 지었는데, 여기에 이향성이 인왕산 기슭에 집을 지었다고 하였고, 임진왜란 중에는 홍양의 옛집에 우거(寓居)하였다고 하는데, 홍양은 홍주,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이다. 이정민 또한 서울과 홍주를 오가는 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보령의 용인 이씨 중 주목되는 인물은 양주 조씨 조존성(趙存性)[1554~1628]의 부인이다. 양주 조씨경주 이씨 가문의 사위로 보령에 터를 잡은 집안이다. 보령의 주요 세거성씨와의 혼맥이 연결되는 것이다. 이정민의 누이와 혼인한 의령 남씨 남이성(南二星)[1625~1683]도 가까운 결성(結城)의 인물이었다.

1594년 이몽학(李夢鶴)[?~1596]의 난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을 도와 난을 진압하는 데 힘쓴 덕에 뒤에 청난공신(淸難功臣)에 녹훈되었고, 의금부도사·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당진현감 재직 시 공홍도순검사(公洪道巡檢使) 권반(權盼)[1564~1631]에 의하여 탐오(貪汚) 수령으로 탄핵을 받아 관력을 마치게 되었다.

이정민이 거처하던 세심대(洗心臺)는 경치 좋기로 도성 내에서도 제일이었다. 광해군(光海君)[재위 1608~1623]이 세심대를 빼앗고 대신 벼슬을 주었으나, 이를 피하여 홍주 봉서산(鳳棲山) 아래로 돌아갔다. 만년에는 보령 옥계(玉溪)에 거주하고 ‘옥계’를 호로 삼았다.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옥계리에 옥계정을 짓고 소요하였으며, 그 옆의 석벽(石壁)에 ‘옥계(玉溪)’ 두 자를 새겼다.

[학문과 저술]

이정민이 날마다 쓴 일기를 묶은 『파안록(破顔錄)』이 있다. 이정민은 시사 문제를 꺼리지 않고 직필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일컬어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 칭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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