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477
한자 李山斗
이칭/별칭 자앙(子仰),나졸재(懶拙齋),청헌(淸憲)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80년연표보기 - 이산두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14년 - 이산두 사마시 입격
활동 시기/일시 1732년 - 이산두 유생 수석으로 직부전시 특혜받음.
활동 시기/일시 1733년 - 이산두 식년문과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58년 - 이산두 판결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68년 - 이산두 지중추부사 임명
몰년 시기/일시 1772년연표보기 - 이산두 사망
부임|활동지 부임지 -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지도보기
묘소|단소 이산두 묘소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전의
대표 관직 지중추부사

[정의]

조선 후기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지역인 남포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이산두(李山斗)[1680~1772]는 시험 도중 자신이 잘못 읽은 한자를 먼저 말하는 정직한 모습을 보였는데, 영조(英祖)[재위: 1724~1776]는 이 모습을 높이 샀다. 지중추부사, 남포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가계]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앙(子仰), 호는 나졸재(懶拙齋)이다. 할아버지는 이명길(李鳴吉), 아버지는 이필(李泌), 어머니는 안칭(安偁)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산두는 경상북도 안동 사람이다. 1714년(숙종 40) 사마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고, 1732년(영조 8) 유생으로 강경(講經)에서 수석(首席)을 차지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조선 시대 과거의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의 특혜를 받았다. 173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여러 벼슬을 거쳤다. 1758년에 판결사(判決事)를 지냈고, 1768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일찍이 시위(試闈)[과거 시험을 보는 곳]에 들어가 강(講)을 하였는데, 한자를 잘못 읽었음을 깨닫고 강이 끝나면서 이 사실을 실토하자, 대관(臺官)이 놀라면서 남이 알지 못하는데 스스로 밝히려 하느냐고 하였다. 이산두는 “남이 비록 알지 못한다고 하여 나 자신을 속이고 하늘을 속이겠는가”라고 하여 듣는 이들이 경탄하였다.

남포군수(藍浦郡守)로 천거되어 외직으로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에는 겨우 초옥 몇 칸만 남게 되었는데, 남들은 이산두가 새로 관직을 떠난 것을 알지 못하였다. 기로소에 들어갔을 때 영조는 이산두를 자주 볼 수 없음을 안타까이 여겨 공인에게 이산두의 도상(圖像)을 그려 오라 하고, 원손(元孫)에게 ‘구십세상(九十歲像)’이라는 네 글자를 쓰게 하였다.

[학문과 저술]

시문집인 『나졸재집(懶拙齋集)』이 있다.

[묘소]

이산두의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청헌(淸憲)이다.

[참고문헌]
  • 『보령시지』(보령시지편찬위원회, 2010)
  • 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