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508
한자 趙顯命
이칭/별칭 치회(稚晦),귀록(歸鹿),녹옹(鹿翁),충효(忠孝)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90년연표보기 - 조현명 출생
출생 시기/일시 1713년 - 조현명 진사시 입격
활동 시기/일시 1719년 - 조현명 증광문과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21년 - 조현명 세제보호론 주창
활동 시기/일시 1728년 - 조현명 이인좌의 난 때 오명항의 종사관으로 종군
활동 시기/일시 1730년 - 조현명 경상도관찰사로 영남 남인 무마 및 기민(饑民) 구제에 진력
활동 시기/일시 1734년 - 조현명 어영대장·부제학, 이조판서·병판서조·호조판서 역임
활동 시기/일시 1740년 - 조현명 우의정·좌의정 역임
활동 시기/일시 1748년 - 조현명 『양역실총(良役實總)』 간행 주도
활동 시기/일시 1750년 - 조현명 균역법 제정 총괄
몰년 시기/일시 1752년연표보기 - 조현명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53년 - 조현명 시호 충효(忠孝) 추증
묘소|단소 조현명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배향지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풍양
대표 관직 좌의정|영의정

[정의]

충청남도 보령 지역 출신의 조선 후기 문신.

[개설]

조현명(趙顯命)[1690~1752]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연잉군(延礽君)이 왕세제(王世弟)가 되자 세제보호론을 주창하여 연잉군을 보호하였다. 영조 즉위 후에는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영조의 핵심 정책인 균역법과 탕평책을 주도한 인물이다.

[가계]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녹옹(鹿翁)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조형(趙珩), 할아버지는 조상정(趙相鼎), 아버지는 도사(都事) 조인수(趙仁壽)이다. 어머니는 김만균(金萬均)의 딸이다. 부인은 초배(初配)[처음 아내]는 칠원 윤씨 윤지원(尹志源)의 딸, 계배(繼配)[새로 맞이한 아내]는 안동 김씨 김성유(金聖游)의 딸이다. 5남 1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조현명은 1690년 건동(乾洞)에서 태어났다. 1713년(숙종 39) 진사시에 입격하고, 171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마방목(司馬榜目)과 문과방목(文科榜目)에는 조현명의 거주지가 모두 한성[서울]으로 표기되어 있다.

어머니는 김장생(金長生)[1548~1631]의 고손녀로, 조현명은 노론계 관료였지만 당색을 초월하여 교유하였다. 1721년(경종 1)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겸설서(兼說書)로서 세제보호론을 주창해 소론의 핍박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왕세제 보호에 힘썼다. 영조 즉위 후에 여러 관직을 맡았는데, 1727년(영조 3) 패초(牌招)[조선 시대에, 임금이 승지를 시켜 신하를 부르던 일]를 어겨 파직되자, 보령 영보정(永保亭)으로 돌아갔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발생하자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1673~1728]의 종사관으로 종군하였고, 그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 풍원군(豊原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대사헌(大司憲), 도승지(都承旨), 경상도관찰사, 전라도관찰사, 공조참판(工曹參判), 어영대장(御營大將), 부제학(副提學), 이조판서(吏曹判書), 병조판서(兵曹判書), 호조판서(戶曹判書)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40년 경신처분(庚申處分)[경종 연간에 발생한 임인옥사를 소론 측의 무고(誣告)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판정한 정치적 처분] 직후 우의정에 발탁되고 뒤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였다. 이때 문란한 양역행정의 체계화를 위한 『양역실총(良役實總)』을 1748년에 간행하게 하였다. 1750년 영의정에 올라 균역법(均役法)의 제정을 총괄하는 등 감필(減匹)에 따른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으나, 대사간 민백상(閔百祥)[1711~1761]의 탄핵을 받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물러났다.

조현명은 조문명(趙文命)[1680~1732]·송인명(宋寅明)[1689~1746]과 함께 영조조 전반기의 완론(緩論)[정치 사안에 대해서 부드럽고 완만한 논의 또는 그러한 입장을 보이는 정파] 세력을 중심으로 노소탕평(老少蕩平)을 주도한 정치가였으며, 민폐를 개선할 다양한 경제정책을 제시한 경세가였다. 조현명 사망 이후 영조는 제문(祭文)을 지어 치제(致祭)[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죽은 신하를 제사 지내던 일. 또는 그 제사]하고, 효행으로 정려(旌閭)를 내렸다. 양주(楊州) 해촌(海村)에 장사 지냈는데, 1791년에 남포 성주산으로 이장하였다.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벌말마을 뒷산이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귀록집(歸鹿集)』이 있고, 『해동가요(海東歌謠)』에 시조 1수가 전하고 있다.

[묘소]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벌말마을 뒷산에 묘소가 있다. 마을에 재실과 고종(高宗)[1863~1907] 때 영의정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지은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1988년에 건립한 것이다.

[상훈과 추모]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벌말마을에 재실과 신도비가 있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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