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3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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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强占期 |
영어공식명칭 | Japanese Colonial Period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혜영 |
[정의]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전라북도 부안군 지역의 역사.
[행정 구역]
일제 강점기 초인 1914년에 전국적으로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전라북도 부안군의 행정 구역도 19면에서 10면으로 개편되었다. 상서면(上西面)·하서면(下西面)·건선면(乾先面)은 그대로 두고, 동도면·하동면을 합해서 부령면(扶寧面), 남하면·소산면을 합해서 주산면(舟山面), 상동면·이도면·일도면을 합해서 동진면(東津面), 남상면·서도면을 합해 행안면(幸安面), 좌산내면·우산내면을 합해 산내면(山內面)으로 개편했으며, 고부군에서 백산면(白山面)을 편입하였다. 1943년에는 부령면이 부안읍으로 승격하여 1읍 9면이 되었다.
[교육 기관]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부안 지역의 교육 기관은 일본인 교육 기관과 조선인 교육 기관으로 나눌 수 있다. 일본인 교육 기관으로는 부안공립심상소학교[1913년 개교]와 줄포공립소학교[1911년 개교]가 있었다. 조선인 교육 기관으로는 부안공립보통학교[1912년 개교]·줄포공립보통학교[1915년 개교]·부서공립보통학교[1922년 개교]·백산공립보통학교[1923년 개교]·주산공립보통학교[1924년 개교]가 있었다.
1926년에 편찬된 『부안군세일반(扶安郡勢一班)』에 따르면 부안군의 전체 학생 수는 모두 2,190명이었다. 1932년 전라북도 부안군 학령 아동 수와 취학 아동 수 조사에 의하면, 부안 지역 전체 학령 아동 수는 2만 200여 명에 이르렀지만 취학 아동 수는 1,600여 명에 불과하였다. 서당 교육을 받던 약간의 아동을 제외한 나머지 1만 8500여 명은 문맹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당시 전라북도 부안 지역에서는 백산면 원천리의 노동야학회와 삼각독서회, 행안면 진등리의 노동 야학 등을 설립하여 미취학 아동뿐만 아니라 성인들도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농민 생활]
전라북도 부안군은 동진강(東津江)을 끼고 김제·고창과 경계를 이루며 경지가 비옥하여, 일본인들이 농장을 경영하기 위해 일찍부터 이주해왔다. 1920년대 전라북도 부안 지역의 일본인 농가 및 인구는 174호 727명이었고, 이 중 50정보[약 49만 5868㎡] 이상을 소유한 일본인 지주만 해도 마에다 츠네타[前田恒太郞][199.8정보], 가와노 나가쿠[川野長久][198.5정보], 스즈키[鈴木仁三郞][147정보], 가와노[川野澄生][73.7정보], 미야케[三宅助六][57.4정보] 등 5명이나 있었다. 조선인 대지주도 많아서, 100정보[약 99만 1736㎡] 이상을 소유한 지주가 5명이나 되었다.
1920년대 전라북도 부안 지역의 조선인 가구 및 인구는 1만 5123호 7만 5567명에 이르렀고,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였다. 전체 농가 중 소작농의 비율은 79.4%로 같은 시기 전라북도의 70.3%와 비교해 9.1% 정도가 높아 대지주의 밀집도가 상대적으로 더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전라북도의 전체 농가 수는 21만 9000여 호였다. 부안은 김제, 옥구 등과 함께 일찍부터 농장형 대지주가 뿌리를 내린 전라북도의 대표적인 소작 지대, 즉 고액의 부채, 고율의 소작료와 수리 조합비, 다수의 춘궁 농가 등으로 상징되는 지역이었다.
[민족 운동]
일제 강점기 3·1 운동 당시 전라북도 부안에서는 천도교 단체와 기독교 단체가 연합하여 부안 장날인 3월 30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각 면과 마을을 순방하며 시위 동참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비밀리에 선언서와 태극기를 준비하여 각 지역에 배부하던 중 일본 관헌에게 정보 일부가 탐지되었다. 낮에는 도저히 집단행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야음을 이용해 거사하기로 결정·실행했고, 3월 30일 밤 부안읍 뒷산에서 올린 봉화를 신호탄으로 독립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여러 산에서 잇달아 올린 봉화와 함께, 횃불과 등불을 든 만세 행렬이 퍼져 나갔다.
4월 초순에는 줄포의 공립 보통학교 3학년~4학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학교 교정에서 만세 운동을 일으키려고 계획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줄포 장날인 4월 18일에도 만세 운동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일본 관헌의 삼엄한 경계와 진압책으로 본격적인 행진이 이어지지 못한 채, 학생들이 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돌리며 만세를 부르는 정도에 그쳤다.
한편,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부안 출신의 주요 독립운동가로는 고평(高平), 백정기(白貞基), 은희송(殷熙松) 등을 들 수 있다. 고평은 1919년 중국 길림성(吉林省) 연길현(延吉縣)에서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여 중부의군부 참모장으로 활동하였다. 백정기는 1933년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에서 일본 정치인과 참모 부원, 중국의 친일 정치인, 군인 등 100여 명이 모여 연회를 갖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모두를 몰살하기 위한 준비를 하다가 사전에 발각·체포되었고, 옥고를 치르던 중 사망하였다. 은희송은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 만세 운동을 촉구하기 위해 독립 운동 취지문을 작성·송부하며 직접 만세 운동을 준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