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527
한자 高弘建神道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석불산길 138[청호리 산132-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유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80년 7월 22일 - 고홍건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655년 8월 28일 - 고홍건 사망
건립 시기/일시 1668년연표보기 - 고홍건 신도비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1984년 4월 1일연표보기 - 고홍건 신도비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11호 지정
현 소재지 고홍건 신도비 -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석불산길 138[청호리 산132-2]지도보기
성격 신도비
양식 비석
관련 인물 고홍건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160㎝[높이]|80.5㎝[너비]|26㎝[두께]
소유자 제주 고씨
관리자 제주 고씨
문화재 지정 번호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11호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무신 고홍건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1668년에 세운 비.

[개설]

고홍건(高弘建)[1580~1655]의 본관은 제주이고 자는 입부(立夫)이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뛰어나고 몸집도 커서 23세 때인 1603년(선조 36)에 실시된 계묘 정시 무과에 급제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왕을 모시고 공주로 피난을 갔는데 그 공으로 종2품 가선대부가 되어 영원군에 책봉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옮기자 어가를 모셨고 서쪽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되었다. 이 때의 공로로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이름이 올랐으며 충청병마절도사(忠淸兵馬節度使)에 제수되었다. 이후 고홍건은 여러 관직을 거쳐 도총관(都摠管)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다가 1655년(효종 6)에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건립 경위]

고홍건 신도비(高弘建神道碑)고홍건이 세상을 떠난 지 13년이 지나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668년(현종 9)에 건립되었다.

[위치]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산132-2번지, 제주 고씨 종중 산인 석불산 기슭 종중 묘역의 앞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중앙에 호성공신(扈聖功臣) 고희(高曦)의 묘가 있고, 그 아래에 아들 고홍건의 묘와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형태]

고홍건 신도비는 화강암으로 된 귀부(龜趺)와 비신(碑身), 이수(螭首)로 구성되어 있는데, 귀부와 이수의 조각이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다. 귀부의 머리는 북쪽을 향해 약간 쳐들고 있어 힘찬 기상을 표현하였고 구름과 용을 새긴 이수 위에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이 조각되어 있다. 신도비의 전체 높이는 330㎝ 내외이며, 비신은 높이 160㎝, 너비 80.5㎝, 두께 26㎝ 정도이다.

[금석문]

영원군고공신도비명(瀛原君高公神道碑銘)

유명조선국자헌대부지중추부사영원군겸오위도총부도총관고공신도비명(有明朝鮮國資憲大夫知中樞府事瀛原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高公神道碑銘) 병서(幷序)

가선대부리조참판겸인동지경연춘추관예문관직제학성균관대사성(嘉善大夫吏曹參判兼印同知經筵春秋館藝文館直提學成均館大司成) 세자우부빈객조부양찬(世子右副賓客趙復陽讚)

가선대부병조참판(嘉善大夫兵曹參判) 이정영서(李正英書)

통정대부행(通政大夫行) 홍문관응교지제교(弘文館應敎知製敎) 겸경연시강관(兼經筵侍講官) 춘추관편수궁교서관교리한학교수려성제록공설홍건성고씨자립부기선출제주유왈적위고려감찰어사기후세세창대상계위경상증조왈세가도총부경력증공보참판조왈사렴함경남도우후증병증판서제원군고왈희호성공신영성군증호증판서비부녕금씨의복지녀영성지제성주판관증병조참의현취사의한양조필녀실생공영성무자자언공이경진칠월이십이일생유기도이범아계묘등무과계축위수문장이공신적장출륙품임술위찬주사군관유로승통정갑자역변호종공주승가선습봉위영원군을축배희천군수신미위려산영장심득사졸심질만잉가일세기군립유애비갑술배오위장병자지란호가입남한성위서문협수장장단궐부사이공위지이이자청출전유공배충청도병마절도사가계가의상환도인견세문이견지지영수습산망실심무마지신이간어중이관군정심열거후립비(春秋館編修宮校書館校理漢學敎授呂聖齊箓公說弘建姓高氏字立夫其先出濟州有曰迪爲高麗監察御史其後世世昌大相繼爲卿相曾祖曰世家都摠府經歷贈工普參判祖曰士廉咸鏡南道虞候贈兵曾判書濟原君考曰曦扈聖功臣瀛城君贈戶曾判書妣扶寧金氏義福之女瀛城之弟星州判官贈兵曹參議睍娶司議漢陽趙珌女實生公瀛城無子子焉公以庚辰七月二十二日生幼氣度異凡兒癸卯登武科癸丑爲守門將以功臣嫡長出六品壬戌爲賛晝使軍官有勞陞通政甲子逆變扈從公州陞嘉善襲封爲瀛原君乙丑拜熙川郡守辛未爲礪山營將甚得士卒心秩滿仍加一歲其軍立遺愛碑甲戌拜五衛將丙子之亂扈駕入南漢城爲西門協守將長湍闕府使以公爲之已而自請出戦有功拜忠淸道兵馬節度使加階嘉義上還都引見勢問而遣之至營收拾散亡悉心撫摩持身以簡馭衆以寛軍情甚悅去後立碑) 여려산시임오제오위도무부부총관출위서흥부사시임공광위감사성엄수재다피책벌독어공매칭장자수유과오역위지관서정해참녕국공신회맹승자헌대부무자배도총관신묘배지중추부사시추퇴귀호남지부안구거축실죽림간우유자오을미팔월이십팔일병졸년칠십륙용시년십월장우부안하서선롱지측부감지원조정견관치제(如礪山時壬午除五衛都撫府副摠管出爲瑞興府使時任公絖爲監司性嚴守宰多被責罰獨於公每稱長者雖有過誤亦爲之寬恕丁亥參寧國功臣會盟陞資憲大夫戊子拜都摠管辛卯拜知中樞府事是秋退歸湖南之扶安舊居築室竹林間優游自娛乙未八月二十八日病卒年七十六用是年十月葬于扶安下西先隴之側負坎之原朝廷遣官致祭) 여례공장신미수유려력선기사위인돈후(如禮公長身美鬚有膂力善騎射爲人敦厚) 성효우거가리직구유가관 전부인함안박씨생원홍립녀무자후부인기계유씨첨지중추부사제증녀생일남조요자족제홍선자두황두황취사인금자라녀(性孝友居家莅職俱有可觀 前夫人咸安朴氏生員弘立女無子後夫人杞溪兪氏僉知中樞府事悌曾女生一男早夭子族弟弘選子斗煌斗煌娶士人金自鑼女) 생삼남이녀(生三男二女) 수일(守一),재일(宰一),우일개유녀미자(宇一皆幼女未字) 측실자두번(侧室子斗燔) 취사인라환서녀(娶士人羅瓛庶女) 생일남삼녀장녀적리흔여유여소시문공명숙두란이유부인지명자부안주경사(生一男三女長女適李焮餘幼余少時聞公名熟斗爛以兪夫人之命自扶安走京師) 청소이기제묘도자(請所以記諸墓道者) 수위지명왈흘흘지용순순기질(遂爲之銘曰仡仡之容恂恂其質) 새저행능비유동벌(塞著行能匪惟動閥) 고작존치안거이몰(高爵尊齒安居以歿) 산지원(山之原) 기고차길(旣固且吉) 무신이월(戊申二月) 일립(日立)

비의 상단에 가로쓰기로 ‘영원군고공신도비명(瀛原君高公神道碑銘)’이라는 제호가 새겨져 있다. 그 아래 앞면 전체에 꽉 차게 작은 글씨의 해서체로 고홍건의 생애를 기록하였다. 비의 제호는 여성재(呂聲齋)가 전서(篆書)하였고, 대제학(大提學) 조복양(趙復陽)이 글을 짓고,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정영(李正英)이 글씨를 썼다.

[현황]

고홍건 신도비의 제호는 아직도 선명한 상태이나, 그 아래 비문은 마모된 글자도 여럿 보인다. 그러나 글씨는 대부분 판독할 수 있는 상태이다. 제주 고씨 종중 산인 석불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데 주변 인근에는 석불산 영상랜드가 조성되어 있다. 고홍건 신도비고희고홍건을 비롯한 고씨 종중 묘역의 전면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묘역 주변은 송림이 우거져 있는 등 매우 좋은 풍광을 보이고 있다.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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