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013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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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吉用 |
영어음역 | Yi Gilyong |
이칭/별칭 | 파하(波荷),월강(月江)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부천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추교찬 |
[정의]
일제강점기 부천 지역에서 성장한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이길용의 고향은 경상남도 마산으로, 아버지 이치상(李致相)과 어머니 이복순(李福順) 사이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 부평 지역으로 이사해 영화학교(永和學校)를 마쳤다. 1916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1918년에 귀국하였다. 철도국에서 근무하던 중 1919년 3·1독립선언서와 임시정부의 기밀문서를 철도편으로 운송하는 책임을 맡아 활동하다 발각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출감하여 『동아일보』 인천지국 기자로 활약하였으며, 1923년부터 매년 개최되는 전조선여자정구대회를 전담하여 주관하였다. 1924년 11월 조선체육회 실무위원이 되었으며, 1924년 『조선일보』로 이적하였다. 1925년 제1회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 임원, 전조선중학교 농구선수권대회 위원 등을 지냈다. 1927년 『동아일보』로 다시 돌아왔으며, 다른 신문사 기자들과 뜻을 모아 1927년 8월 서울 영금정(令今亭)에서 조선운동기자단을 조직하여 운동경기의 전문화에 기여하였다.
1932년 8월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 출전한 김은배(金恩培)와 권태하(權泰夏) 선수가 골인하는 사진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없애 버렸다. 1936년 8월 『조선중앙일보』에서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말소하자, 이길용도 『동아일보』의 ‘명예(名譽)의 우리 손군(孫君) 세계제패의 개가(凱歌)’라는 제하의 손기정 선수 시상식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하였다. 이 사진은 『신동아』에도 실렸다. 이 사건으로 이길용은 사직당하고 『동아일보』는 정간되었으며, 『신동아』는 폐간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조선체육동지회 결성에 적극 참여하였고, 그 결과 조선체육회[현 대한체육회]를 부활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945년 조선체육회 상무이사로 선임되고, 이듬해 『동아일보』가 복간되자 사업부 차장으로 복직하였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서울특별시 고문, 이화여자대학교 이사, 국민당 중앙당 상임위원 등의 사회활동을 하였다. 1949년 10월 대한체육회 공로상을 받았으며, 체육사를 정리하여 『체육연감』과 『대한체육사』가 발간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조선야구사』(1930)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89년 한국체육기자연맹에서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제정하여 매년 수여하고 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