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C01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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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춘의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상원 |
사대부들도 고개 숙인 당아래고개
춘의동을 넘어가는 고개에는 마을의 나이만큼 수령이 오랜 한 그루의 늙은 나무가 서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이를 당나무라고 불렀다. 서낭당 대신에 서 있는 나무라서 당나무라고 부른 이 나무는 오래전에 자람을 멈추어 버렸지만 이 당나무 터는 마을의 모든 대소사를 논하기 위하여 다듬어진 자리이며, 마을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에게 품안의 역할을 해 낸 자리이다. 이 늙은 당나무 밑의 자리를 가리켜서 마을을 지켜주며, 마을 사람을 위하여 무엇이든 척척 해내던 자리라고 말해도 누구 하나 나무라지를 못했다. 늙은 당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무엇과도 견줄 수 없었다.
당아래고개에는 사람의 이야기가 남아있다. 옛 사람의 발자취에 뒷사람의 발자취가 더해져서 삶이 되고 역사가 된다. 그 길을 걷다보면 산을 만난다. 돌아서 갈 수는 없으니 사람을 막아서는 산의 낮은 곳을 택해서 넘는다. 그곳이 고개다. 결국 고개도 길의 연속이다.
춘의동 지역은 당나무가 있던 당아래고개를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당아래고개는 원미산의 줄기가 춘의동과 원미동의 경계를 이루는 산줄기 끝자락에 해당하는 산등성이[춘의주공아파트단지]를 칭하는데 바로 산 끝자락의 등성이에서 도당굿을 지낸다고 해서 당재 또는 도당현이라고 일컬어졌다.
하지만 이곳에 아파트가 생길 때 마을 사람들은 당아래고개를 사수하지 못했다. 당아래고개는 뿌리 깊은 당나무(노송나무)와 서낭당이 있었던 자리여서 옛날 사대부들도 이 당아래고개를 지날 때에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넘어갔고 혼례나 장례행렬은 통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이토록 신성한 땅이었건만 이제 이 당아래고개는 춘의동의 주요 마을인 ‘당아래’, ‘가운데 당아래’, ‘너머 당아래’라는 세 개 마을의 위치를 구분하는 역할만 할 뿐이다.
당아래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부천 토박이인 구자룡 시인이 쓴 글에서도 나타난다.
“귓전 후려치는 높새바람 언덕 위에 버려두고 가던 길 따라 당아래에 머뭅니다. 그 동안 이길 저길 여러 차례 오갔건만 오늘처럼 성황당에 오긴 처음입니다. 이 동네 할머니 머리 따고 댕기 매던 처녀시절 마을신 수호신 모셨던 성황당 사이에 두고 아랫마을 한쪽을 당아래라 부르게 되니 아직도 그 사연 잊지 않고 오는 길손 가는 길손 당아래라 부릅니다.”
당아래는 당재아래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성황당 아래라는 의미이다. 당아래 길은 겉저리에서 멧마루로 가는 길을 말한다. 당아래는 당(堂)아래에 있는 길이라는 뜻으로 해석을 하지만 당(唐)으로 해석해 둑 아래쪽에 있는 길이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조마루 할미당이나 할배당은 당아래와 그 거리가 너무 멀고 이들 양지마을에서 당집들로 통하는 길이 겨우 오솔길이었기 때문이다.
가운데 당아래는 당아래고개 길을 사이에 두고 양지마을과 경계를 이루는 마을로 서당 아래 세 개 마을 중 가운데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서 가운데 당아래라고 했다. 이곳에 전주이씨 화의공파, 원주원씨, 수성최씨가 혼재하여 촌락을 이루고 살아왔다고 전한다.
현재, 가운데 당아래는 옛 집 몇 채만을 남기고 고스란히 공단으로 포함되어 대흥기계, 대아정밀 같은 공장지대가 되었다.
너머 당아래는 양지마을에서 볼 때 가운데 당아래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너머 당아래라고 했다. 이 마을은 현재 부천종합운동장 인근에 위치하고 있던 마을로, 당아래 3개의 촌락 중 제일 먼저 형성된 마을이라고 한다. 너머 당아래에는 원주원씨 몇 집이 촌락을 이루고 조용히 살아왔다.
이 마을은 고비골 위쪽에 위치해 있어 중동벌을 타고 들어오는 해일이나 물난리에 가장 안전할 수 있었다. 또한 고비천 양쪽을 둑으로 막아 얼마간의 농토를 얻을 수 있어서 농사짓기에 적합했다. 더구나 부천종합운동장 주차장 일대에 방죽이 있어서 농지에 물 대는 것이 가능했다.
가운데 당아래에서 너머 당아래로 넘어가는 오솔길에는 낮고 둥근 산등성이가 있었는데 이 산등성이를 모지래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모지래에는 밤나무가 많아서 아이들이 밤을 주으러 많이 다니던 곳이며 얼마 전까지도 목장지로 젖소들이 뛰어 놀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춘의로와 멀뫼로가 건설되어 모두 없어진 상태이다.
뿌리 깊은 당나무가 있는 신성한 마을에 내려오는 신비스러운 이야기도 있다. 양지마을에서 춘지봉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작은 옹달샘이 있었다고 한다. 이 밑우물은 원래 유명한 약수로서 사대부 집 규수들이 쌍가마를 타고 이곳에 와서 약수를 떠놓고 지성을 드리곤 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언젠가 양지마을에 새로 이사를 온 아낙이 이곳에서 어린아이의 똥 걸레를 빤 뒤 부정을 타 이 신성한 우물의 물맛이 변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수많은 까치 떼가 날아와 뱀을 잡아먹기 시작했고, 까치가 뱀을 물고 날아가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는데 이후 우물물의 효험이 회복되지 못했다고 한다.
춘의동에는 신성한 나무와 우물이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주었다. 비록 도시화에 휩쓸려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지만 초록빛이 그득한 마을은 늙은 당나무를 닮아 다음 봄에도 새 눈의 촉을 틔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