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0232 |
---|---|
한자 | 朴弼正 |
영어음역 | Park Pilj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민식 |
[정의]
조선 후기 노론의 대표적 인물.
[가계]
본관(本貫)은 밀양(密陽), 자(字)는 계심(季心), 호(號)는 일휴(逸休)로 강수(江叟) 박훈(朴薰)[1484~1540]의 후손이다. 청주 출신으로 참봉 박세증(朴世拯)의 아들로 외할아버지는 이여절(李汝晢)이다.
[경력]
1711년(숙종 37)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6인으로 합격하였다. 1711년 가주서(假注書)를 시작으로, 부사정(副司正), 주서(注書)·사정(司正)·자여찰방(自如察訪)·전적(典籍)·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좌랑(佐郞)과 정랑(正郞), 1718년 정언(正言)을 거쳐, 1720년 장령(掌令)이 되었다.
1722년(경종 2) 사과(司果)로 있을 때, 노론을 축출하고 소론 정권을 수립한 이후 소론 중 과격파로서 노론 탄압의 앞장을 섰던 김일경(金一鏡)의 척소(斥疏)를 받아 삭직(削職)되었으나, 1725년 영조(英祖) 즉위와 함께 다시 복직되었다.
이 후 장령·헌납(獻納)을 거쳐, 1734년(영조 10) 판결사(判決事), 1737년 예조참의(禮曺參議), 1739년 북청부사(北靑府使), 1741년 승지(承旨), 1751년 사직(司直), 후에 한성부좌윤을 지냈다. 북청부사로 재직할 때 군기(軍器)를 보수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기도 하였다.
[활동사항]
숙종(肅宗)·경종·영조 등 3대의 20여 년 동안 요직에 있으면서 신임을 받았고 정사 논의에는 강직한 발언을 하였다. 또한 문서의 번복을 꺼림에 임금도 그의 성의를 알고 청종(聽從)하는 때가 많았다. 그리고 정의감이 강하여 토역(討逆)의 논의에도 몸소 나섰다.
[저술]
『일휴재참판공만록(逸休齋參判公漫錄)』이 있다.
[묘소]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태락리에 있다. 송병선(宋秉璿)이 찬(撰)하여 1941년에 세운 신도비가 묘소 입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