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6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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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百濟 |
영어음역 | Baekje |
이칭/별칭 | 백제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양기석 |
[정의]
삼국시대 고대국가 중의 하나.
[개설]
서기 전후 무렵에 성립되어 660년 당에게 멸망할 때까지 한반도 서남부에 존재했던 나라로 마한(馬韓) 50여개 소국의 하나인 백제국(伯濟國)이 성장 발전하여 이룩한 나라이다.
[변천]
백제는 한강유역에 자리를 잡은 마한 소국의 하나로서 나라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건국설화에 의하면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의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남쪽으로 내려와 한강 하류유역에 정착을 하다가 온조가 나라를 세운 것으로 전하고 있다. 백제는 건국과정이 분명치는 않으나, 부여족 계통의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차츰 마한 소국들을 병합하고 또한 한반도 서북한에 설치된 중국의 군현세력을 물리치면서 한강유역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 발전하게 되었다. 3세기 중엽 고이왕(古爾王, 234~286) 때에는 안으로 관제를 정비하고 밖으로 중국 군현세력과 군사적 충돌을 벌리면서 고대국가로서의 기반을 갖추었다.
이어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에는 영산강 유역의 마한세력을 통합하고 고구려의 남침을 제압하여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킬 정도로 영토를 크게 확장시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 뒤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백제는 한강유역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475년 수도를 웅진으로 옮겨 재기를 시도하였으며, 538년(성왕 16)에는 다시 사비로 천도하여 중흥을 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 무리한 전쟁과 잦은 토목공사, 사치, 그리고 신라와 당간의 국제관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백제시대의 청주]
삼국 중 청주지역에 처음 진출한 나라는 백제이다. 백제가 청주지역을 지배한 시기는『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의거해 볼 때 기원 후 63년(다루왕 36)부터 신라가 북진하여 청주지역에 진출하는 6세기 중반경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관련 기록이 절대 부족하여 백제의 청주지역 지배 실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청주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백제시대의 고분자료를 통해 백제의 청주지역 지배양상을 단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백제초기의 고분인 송절동 토광묘 축조단계(절대연도 50~400)에서 봉명동유적 단계(절대연도 150~390)를 거쳐 신봉동유적 단계(4세기부터 6세기 초반)로 문화양상이 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송절동과 봉명동유적 단계에는 천안, 공주, 진천 등지에서 보이는 것처럼 무덤 주위에 도랑이 돌려진 주구토광묘, 서북한 계통의 대형목곽묘, 그리고 당시 위세품으로 보이는 말 모양의 허리띠[마형대구] 등이 나타난다. 당시 청주의 재지세력은 백제 중앙세력과는 직접 연관성이 보이지는 않으나 중서부지역에서 중요한 거점세력으로 자체 성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어 신봉동유적 단계부터 백제의 성장 발전에 따라 백제로부터 직접 지배를 받는 단계로 들어간다. 신봉동유적에는 소형인 화장묘에서부터 토광묘가 주요 묘제로 자리하고 있다. 토광묘는 원칙적으로 단독묘에서 자갈다짐을 한 대형목곽묘가 나타나고, 다음 단계에 석실분이 출현한다.
유물상은 마구류의 성행, 신봉동식 손잡이 달린 잔(손잡이잔)의 성행, 새발자국 문양이 새겨진 조족문토기(새발자국무늬토기)의 성행 등의 특징적인 요소가 나타난다. 그리고 다리가 세 개 달린 삼족토기가 등장함으로써 백제 중앙세력과 깊은 연관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