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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0230
한자 漆谷淨兜寺址五層石塔
이칭/별칭 정도사지 오층 석탑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탑과 부도,문헌/문서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63년 1월 21일연표보기 -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 보물 제357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 보물 재지정
성격 불교 유물
양식 고려 전기 양식
건립시기/연도 고려 전기/1031년
관련인물 현종|품유(稟柔)|광현(光賢)|지한(智漢)
높이 4.63m(글자크기 4cm, 해서체)
소재지 주소 원소재지: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현소재지: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로 2000 국립대구박물관
소유자 국유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 정도사지에서 발견된 오층석탑과 형지기(形止記).

[개설]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 정도사지(淨兜寺址)에서 발견된 오층석탑과 조성 형지기를 통해 고려 전기 불교의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오층석탑은 고려 전기 탑의 조성이 민간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갔고, 그 과정에서도 각 지역별 특색에 맞게 석탑이 조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형지기는 고려 전기 지방 사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형지기에는 건탑의 인연(因緣), 시납(施納)의 상황, 공사의 사실, 양전(量田) 등을 이두식 표현으로 기재하고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이두 연구뿐 아니라 고려 전기의 사회사·경제사·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은 1963년 1월에 보물 제35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건립경위]

5층석탑은 1019년(현종 10)부터 1031년(현종 22)까지에 걸쳐 상주계(尙州界) 지경산부(知京山府)에 속하였던 약목군(若木郡)의 향리와 백성들의 발원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즉 군백성(郡百姓) 광현(光賢)이 석탑 오층을 세울 것을 발원하고 죽자, 형인 부호장(副戶長) 품유(稟柔)가 여러 사람을 권선(勸善)하여 탑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을 적고 있다. 이때 탑 건립을 주도한 것은 승려 지한(智漢)으로 향리들에게 석탑의 건립을 의뢰받았던 군선원(郡禪院)의 승려이다.

[위치]

석탑은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복성동 정도사지(淨兜寺址)에 있었다. 1905년경 경부선 철도를 놓는 과정에서, 석탑을 해체하여 1924년 서울 경복궁으로 옮겼다. 석탑 해체 과정에서 유합(鍮合) 안에 있는 형지기, 녹유사리병(綠釉舍利甁), 2개의 동합(銅盒) 등이 발견되었다. 1994년에 국립대구박물관의 개관으로, 현 위치로 옮겨 세웠다.

[형태]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은 이중 기단 위에 오층의 탑신으로 건조되었다. 좋은 양질의 화강암으로 만든 탓으로 석탑 표면에 손상이 없고 깨끗하게 남아 있다. 현재는 기단부, 탑신부는 있으나 상륜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단부는 전부 땅 위에 노출되어 있고 하층 기단에는 탱주를 두지 않고 각 면에 3구씩의 안상(眼像)을 조각하였으며 지선(地線)에서 내부를 향하여 꽃 모양의 무늬가 또렷하게 솟아올라 있다. 이러한 양식은 고려적(高麗的)인 안상이라 할 수 있다. 상층기단에는 각 면에 탱주 1주씩을 모각하였고, 상하 기단의 갑석 상면에는 약간의 경사를 두고 있다. 상층기단 갑석 상면의 굄대는 1단뿐으로 보통 일반형 석탑의 호형과 각형의 2단 괴임 구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상층기단 면석에 탑명이 새겨져 있다.

탑신부는 몸체[옥신]과 지붕[옥개]이 각각 1석으로 되어 있다. 지붕돌은 너비가 좁고 두꺼우며, 추녀 끝은 위로 들려 있다. 이러한 양식은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지붕 받침은 4단으로 줄었고 추녀 밑으로 낙수홈이 새겨져 있다. 또한 몸체의 높이가 2층으로 올라가면서 급격히 감축되고 있다. 2층 이상의 지붕돌은 감축률이 적으면서도, 좁고 두꺼워서 고준(高峻)한 감을 준다. 일층 탑신 남면에는 호형(戶形) 안에 자물쇠 모양이 새겨져 있다. 오층 지붕돌이 없어져서, 오층 몸체 위에 바로 탑의 최상부 지붕돌 위에 놓아 복발·앙화·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인 노반(露盤)이 올려 있다. 나머지 상륜부는 전부 사라지고 남은 것이 없다.

[금석문]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의 탑명과 형지기에 따라 정도사의 창립 시기 등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정도사지 오층석탑의 탑명은 상층기단 면석에 새겨져 있다. 글자 크기 4cm의 해서체로, 면석 말미 부분에 “태평십일년신미정월사일(太平十一年辛未正月四日)”이라고 적혀 있다. ‘태평십일년’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연호로 1031년 즉 현종 22년에 해당한다. 요나라는 태평이라는 연호를 1030년까지 사용했고, 1031년부터는 경복(景福)의 연호를 사용했다. 아마도 고려는 그 사실을 몰라 태평이라는 연호를 계속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탑 내부에서는 백지묵서(白紙墨書) 형지기, 녹유사리병(綠釉舍利甁), 2개의 동합(銅盒) 등의 사리 장치가 발견되었다. 형지기는 한자와 이두식이 병기된 형태로, 54행(行) 2천여자(字) 정도로, 고려시대의 고문서로서는 보기 드문 장편이다. 형지기의 제목은 “태평십일년세차신미정월사일고려국상주계지경산부사임약목군내손방재정도사오층석탑조성형지기(太平十一年歲次辛未正月四日高麗國尙州界知京山府事任若木郡內巽方在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이다. 형지기에는 건탑의 인연(因緣), 시납(施納)의 상황, 공사의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탑을 만든 목적은 국가의 영원한 평안, 전쟁의 종식, 풍성한 곡물 재배 등을 기원하면서 만들었다. 형지기에는 부분적으로 양전대장의 내용이 나타나고 있는데, 955년(광종 6) 양전사(量田使)가 하전(下典)·산사(算士) 등을 대동하고 현지에 가서 그 이전의 양전대장(導行)을 토대로 양전을 실시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첫째, 고려와 거란의 외교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큰 의의가 있다. 고려가 통상적으로 많이 사용하던 송나라 연호가 아닌 ‘태평’이라는 요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중요하다. 거란이 3차에 걸쳐 고려를 대대적으로 침략한 사실은 우리 역사에 큰 충격과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평가된다. 993년(성종 12) 제1차 침입, 1010년(현종 1) 제2차 침입, 1018년(현종 9) 제3차 침입이 그것이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지루한 고려와 거란 간의 전쟁은 양국 간에 화해 무드를 불러와 1019년(현종 10) 8월부터 국교가 회복되고 사절의 왕래가 재개되었다. 그리하여 고려는 그 때부터 송나라와 국교를 단절하고 요나라의 연호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양국 간에는 거란이 멸망하는 1125년(인종 3)까지 약 100년 동안 평화적인 관계가 유지되었다.

둘째, 탑 건립 주체가 지방민의 발원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고려시대 석탑을 전국적으로 분포시키는 데 보다 더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전기에 건립된 대표적인 탑들로는 성풍사지오층석탑(聖楓寺址五層石塔), 개천사석탑(開天寺石塔), 개심사지오층석탑(開心寺址五層石塔), 흥국사석탑(興國寺石塔), 사자빈신사지석탑(師子頻迅寺址石塔), 보현사석탑(普賢寺石塔), 장갑사청석탑(長岬寺靑石塔), 신광사석탑(神光寺石塔), 경천사십층석탑(敬天寺十層石塔), 통화명안성장명사석탑지(統和銘安城長命寺石塔誌) 등이 있다. 전국적 석탑 건립 현상은 고려석탑의 양식상에 다양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즉, 전대의 왕도 중심의 일률적인 탑파 건립에서 벗어나 각 지방의 토착 세력이 건탑(建塔)에 관여하였을 때 일률적인 규범보다는 각기 제 나름대로의 특징이 반영되어, 곧 다양성 있는 건탑의 양상을 보이게 되었을 것이다.

셋째, 이두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점이다. 넷째, 고려 전기 지방 사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양전(量田)에 관한 고려 초의 문서 일부를 전재(轉載)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역 사회의 운영 원리와 지방 사찰의 운영 형태 등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어서 고려 전기의 사회사·경제사·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10.28 내용 수정 1)• 이난영 편, 이병도 감수, 『한국김석문추보』(중앙대출판부, 1968) ->• 이난영 편, 이병도 감수, 『한국금석문추보』(중앙대출판부, 1968) 2) • 신호철, 「고려 현종대의 ‘정두사오층석탑조성형지기’ 주해」(『리기백선생고희기념한국사학론총』, 1994) ->• 신호철, 「고려 현종대의 ‘정두사오층석탑조성형지기’ 주해」(『이기백선생고희기념한국사학론총』, 1994)
이용자 의견
관**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10.28
정** 론총도 마찬가지로 논총으로 수정해야 합니다. 2011.01.25
정** 위의 참고문헌에서 몇몇 오기가 보입니다. 김석문의 김은 금으로, 리기백의 리는 이로, 이렇게 수정한다면 김석문은 금석문으로, 리기백은 이기백으로 수정해야 합니다. 2011.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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