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8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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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望亭部落 遺跡碑 |
영어공식명칭 | Mangjeong-burak Yujeokbi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서로 243[갈산동 970-2]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신현정 |
건립 시기/일시 | 1992년 6월 - 망정부락 유적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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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명아스틸 -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서로 243[갈산동 970-2] |
성격 | 마을 유적비 |
재질 | 석재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23㎝[너비]|85㎝[높이]|30㎝[두께]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갈산동에 있는 마을 유적비.
[개설]
망정부락 유적비는 1992년 6월 세워진 마을 유래비로서, 마을 지명의 유래, 마을의 역사, 주민 성씨, 삶의 이력, 마을의 인물과 업적, 비를 세운 이유 등이 새겨져 있다. 현재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장동에 속하였던 자연부락인 망정은 원래 대구부 화원현(花園縣) 감물천면(甘勿川面)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거치면서 망정동을 합쳐 장동으로 하고 달성군 성서면에 소속되었다. 1958년 대구시로 들어왔다가 1963년 다시 달성군이 되었다. 1981년 대구직할시 서구 장동, 1988년 대구직할시 달서구 장동, 1995년 대구광역시 달서구 장동이 되었다.
[건립 경위]
1984년에서 2012년까지 5차에 걸쳐 성서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이곡동, 신당동 등 성서 일대는 과거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에서 공단과 관공서, 아파트단지 중심의 신도시로 변화하였다. 그 과정에서 마을이 공단에 편입되는 등의 이유로 마을의 급격한 변화를 겪어야 하였던 성서 지역 주민들은 옛 마을을 기리는 마음에서 마을 유래비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1987년 망정부락에서 이곡동으로 집단이주를 하였던 망정 주민들 300여 명이 1992년 뜻을 모아 세운 망정부락 유적비를 시작으로 신당동 유래비, 선원마을 유래비, 갈미 유허비, 사령봉 유래비 등 열 기 이상의 유래비가 반경 2㎞ 안에 세워졌다. 비석에 새겨진 내용을 따르면, 망정부락 유적비는 세월의 변천에 따라 잊혀 가는 마을의 옛 모습을 기록하고 고향 잃은 아픔을 달래려는 마음에서 세워졌다고 한다.
[위치]
망정부락 유적비는 대구광역시 달서구 갈산동 970-2 명아스틸 앞 화단에 있다.
[형태]
망정부락 유적비는 너비 123㎝, 높이 85㎝, 두께 30㎝이며 기단 위에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주변에는 석재 울타리를 둘러 놓았다.
[금석문]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約四百五十餘年前에 여기 加乙山 동남 기슭에서 남쪽으로는 큰 정자나무를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洛東江을 굽어보며 살아온 自然部落으로 望亭이라고 부르던 마을이 있었던 자리다. 처음에는 金海許氏가 仙源에서 여기에 와서 정착하여 十四代로 살아 八十餘戶를 이루었으며 다음에 全州李氏가 十一代로 五十餘戶가 되고 그 뒤에 仁川崔氏 四戶를 비롯하여 密陽孫氏 星山裵氏 達城徐氏 文化柳氏 錦城羅氏 等 名門의 後裔들이 모여들어 百五十餘家口의 큰 마을을 이루었다. 洛東江 護岸工事가 완공되고 편리한 수리시설이 완비되어 비옥한 쌀미들 일대에 富農을 이루어 순박한 사람들과 인심좋은 이웃들이 화목하게 살아왔다. 그 후 行政區域이 大邱市로 되고 다시 直轄市로 승격됨에 따라 産業化政策의 일환으로 城西工團에 편입되어 산과 들은 물론 정든 마을까지 두고 一九八七年에 성서국도남쪽 梨谷洞으로 集團移住하여 고향을 바라보며 望鄕의 정을 달래고 있다.
떠나온 고향을 그리는 애틋한 마음과 조상대대로 살아온 由來와 그리고 마을의 遺跡을 길이 남기기위하여 望亭사람들의 정성을 모아 이 돌에 새겨 길이 전하고자 한다.
一九九二年 六月 望亭洞民一同
文學博士 李成垕 지음
金文培 씀
[의의와 평가]
망정부락 유적비에는 마을의 역사, 주민 성씨, 비를 세운 이유 등이 새겨져 있다. 옛 지명이나 지역의 변천을 확인할 수 있어 사료적 가치도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