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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035
한자 全伯英 神道碑
영어공식명칭 Jeonbaegyeong Sindobi[Jeongheondaebu Yejopanseo Jiuijeongbusa Munpyeonggong Pagye Oksanjeongong Sindobi]
이칭/별칭 정헌대부 예조판서 지의정부사 문평공 파계 옥산전공 신도비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비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가창동로 219-5[상원리 415]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구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345년 - 전백영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412년 10월 28일 - 전백영 사망
건립 시기/일시 1949년연표보기 - 전백영 신도비 건립
현 소재지 박곡서당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상원리 415 지도보기
성격 신도비
양식 귀부|비신|이수
재질 오석
크기(높이, 너비, 두께) 230㎝[높이]|80㎝[너비]|49㎝[두께]
소유자 옥산전씨 문평공 종회
관리자 옥산전씨 문평공 종회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전백영의 신도비.

[개설]

전백영 신도비(全伯英神道碑)[정헌대부 예조판서 지의정부사 문평공 파계 옥산전공 신도비(正憲大夫禮曹判書知議政府事文平公巴溪玉山全公神道碑)]는 조선 전기 문신이었던 전백영(全伯英)[1345~1412]을 기리고자 1949년에 건립한 비이다. 전백영은 본관이 경산(慶山)이고,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중년에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 지역으로 이거하여 뿌리를 내렸으니, 대구 지역에 성리학의 길을 연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1532~1585]이 전백영의 5대손이다. 전백영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조선 건국 후에는 풍해도[황해도], 경상도, 경기도 등의 관찰사와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예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대구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정2품 판서에 올랐다.

[건립 경위]

원래 전백영의 묘소 아래에는 조선조에 건립한 신도비가 있는데, 규모가 작고 오래되어 심하게 닳고 갈린 상태였다. 후손들은 이러한 상태를 안타깝게 여겨 1949년에 재실인 박곡서당(樸谷書堂) 앞에 다시 전백영 신도비를 건립하였 다.

[위치]

전백영 신도비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상원리 415번지 박곡서당 앞에 있다.

[형태]

전백영 신도비는 재질은 오석이고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螭首)로 이루어져 있다. 비신은 높이 230㎝, 너비 80㎝, 두께 49㎝ 규모이다. 주위에는 둘레석이 쳐져 있다.

[금석문]

전백영 신도비에는 ‘정헌대부 예조판서 지의정부사 시문평공 파계 옥산전선생 신도비(正憲大夫 禮曹判書 知議政府事 諡文平公 巴溪全先生 神道碑)’라는 비제가 적혀 있고, 비문에는 전백영에 대한 소개와 추모의 뜻, 비문을 짓게 된 경위 등을 한자로 기록하고 있다. 비문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호라! 공의 세대가 이미 멀어졌으니 평소의 언행이 유실한 것이 많다. 그러나 그 가운데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의리와 정도를 숭상하고 사도를 배척하는 의논이 후세의 법이 될 수 있고, 세 임금을 섬기면서 한결 같은 충절을 잡아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단충(丹忠)의 정성이 밝게 빛나고 공명과 사업이 성세의 석보(碩輔)가 되었으니, 공은 저절로 불후(不朽)하다 할 것인데 어찌 보잘것없는 군더더기 말을 기다릴 것인가?[鳴呼公之世 旣遠矣 平素言行遺佚者 多焉 而其尊華攘夷之義 崇正闢邪之論 可以爲後世法 歷事三朝 秉執一節 愛君憂國 丹忱炳炳 功名事業爲盛世之碩輔 公自不朽矣 何待蕪辭之騈拇哉 銘曰]”

[현황]

전백영 신도비는 옥산전씨 문평공 종회에서 관리하여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전백영 신도비는 대구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정2품 판서를 역임한 인물의 신도비이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까지 대구 지역에 영향을 미친 인물에 대하여 알려 주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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