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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사회 지역 사학의 요람, 낙교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A010105
한자 傳統社會 地域 私學- 搖籃, 洛橋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교항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경용

[정의]

전통 사회 지역 사학의 요람, 낙교재

[낙교재는 지역사회의 사립학교]

‘낙교서당(洛橋書堂)’으로도 일컫는 낙교재(洛橋齋)는 야헌(野軒) 김성노(金成魯, 1769-1831) 선생이 19세기 초에 세운 일종의 사립학교였다. 낙교(洛橋)는 ‘낙동강 교항(다리목) 마을’이라는 의미로 선생이 태어나서 거주해온 다리목 마을의 서당임을 가리킨다.

선생은 고려조 관직이 정2품 정장사(正章事)였던 오산군(鰲山君)에 책봉된 청도 김씨 시조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岱)의 27세손이자 교항리 다리목 마을 입향조 김유원(金有元) 공의 10세손이다. 선생은 선비가 되고자 대구 연암산 자락의 서용담(徐龍潭) 선생으로부터 학문을 익혔다. 학문을 갈고 닦은 선생은 향시에 누차 합격한 후 후진 양성에 뜻을 두고 금계산 아래에 낙교재를 지어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야헌 할아버지는 이 고을의 유명한 선생이셨습니다. 학문이 뛰어나 일대의 여러 마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글을 배우러 왔습니다. 제자들이 후에는 유림계를 만들어 사후 선생을 추모해왔지요.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서당 낙교재를 처음에는 금계산 자락에다 지었답니다.”(김선린)

[세 번씩이나 옮겨 다닌 낙교재]

낙교재는 모두 세 번식이나 옮겨 다녔다. 처음에는 금계산(金鷄山) 서당골 자락에 세워졌다. 낙교재 상량에는 ‘순조 즉위 13년 임신 10월 10일 오(午)시’라는 문구가 나온다. 순조 재위년(1800-1834)으로 보아 임신년은 1812년으로 선생의 학문이 한창 무르익는 43세에 낙교서당이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금계산 서당골 지명은 낙교재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야헌 처사 묘갈명(野軒 處士 墓碣銘)’에도 “만년에는 금계산 아래 서실을 지어 자제들과 후학을 가르치는 것으로 일삼으니 학생이 백여 명이나 되었고, 과거 시험장에 이름이 알려진 선비들도 많았다”라는 글귀가 나온다.

이후에는 다시 동쪽으로 조금 더 떨어진 작은 서당골로 이동하였다. 옮겨간 년도와 사유는 알 길이 없지만, 이곳 지명도 처음과 같이 낙교재의 존재로부터 연유되었다. 낙교재는 지역 사학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선생에게서 수학한 문하생이 진사 시험에 급제하는 등 유명세를 타자, 소문을 듣고 여기저기서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몰려들었다. 비록 2년 만에 타계하여 빛을 발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실제로 선생의 장남 두상(斗尙, 1794-1829)은 1827년 성균관 진사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일제 강점기 교항마을 이건]

낙교재는 현재 다리목 마을 내 제림 뉴타운 아파트 단지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야헌 김성노 선생의 강학지소로 1900년대 초에 다리목 마을로 옮겨 건립되었다. 낙교재는 역사의 부침 속에서 때로는 험한 행로를 걸어왔으니, 일제 강점기에는 야학이 열리다가 광복 후에는 좌익 사상가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6.25 동란 중에는 민가가 되어 일반인의 거처가 되기도 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6.25 동란 중 수백 가구의 마을이 온통 불탔지만, 낙교재는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최근 야헌 처사 유적 보존회가 결성됨으로써 ‘야헌 처사 청도 김공 유적비(野軒 處士 靑道 金公 遺蹟碑)’도 세우고 명맥만 유지해오던 추모 향사도 복원하였다.

“지금 낙교재는 세 번째 옮겨온 것입니다. 옛날에는 서당 규모가 컸지만, 한 번 옮기면서 적어지고, 두 번 옮기면서 적어지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서당골에 있었습니다. 이후에는 그 옆으로 작은 서당골로 옮겼습니다. 왜정 초기에는 ‘서당이 필요 없다’ 해사가지고 마을로 옮겼지요.”(김선린)

[낙교재 건물 배치와 현판]

우측의 철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3칸 규모로 서향으로 자리한다. 좌측에는 신축한 시멘트 벽돌조의 관리사가 위치한다. 얕은 시멘트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다. 정면 4개 기둥만 원기둥이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사용하였다. 평면은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 협실형(中堂 夾室形)이다. 측면은 한 칸 반 규모의 온돌방에 반 칸의 툇간을 두어 전체적으로는 2칸 규모이다. 가구(架構)는 종량(宗樑) 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도리를 받게 한 5량가(五樑架)이다.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 형태이다.

낙교재 내부에는 3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하나는 선생이 처음 후학 양성의 뜻을 세우고 문간 위에 크게 써 붙여놓았던 ‘야헌(野軒)’ 현판으로 가운데 대청 후미 벽면 상단에 붙어있다. 두 번째는 서당의 이름인 ‘낙교재(洛橋齋)’ 현판으로 대청 입구에 걸려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선생의 행적을 정리한 ‘야헌기(野軒記)’ 현판으로 대청의 우측 벽에 놓여있다. 야헌기는 통정대부 홍문관(弘文館) 시강(侍講) 김홍락이 지었다.

[참고 문헌]

『野軒記』

『野軒 處士 成魯 墓碣名 幷序』

김만채, 『청도 김씨 교리공파 교항계 참고록』(2016)

달성군청, 『대구의 뿌리 달성 제5권-달성을 빛내다』(달성 백서 편찬 위원회, 2014)

청도 김씨 교리공파 교항계 문중회, 『略史記』(2008)

[정보 제공자]

김선린(남, 1930년생, 대구 광역시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교항리 다리목 마을 전 이장)

김만채(남, 1948년생, 대구 광역시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강림리 청도 김씨 교리공파 교항계 문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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