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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535
한자 孫起陽
영어공식명칭 Son Giyang
이칭/별칭 경징(景徵),오한(聱漢),송간(松磵)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동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9년연표보기 - 손기양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85년 - 손기양 사마시 합격
활동 시기/일시 1588년 - 손기양 식년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97년 - 손기양 정유재란 때 의병 활동
활동 시기/일시 1601년 - 손기양 경주 제독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3년 - 손기양 영천 군수 제수
몰년 시기/일시 1617년 1월 11일연표보기 - 손기양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44년 - 손기양 칠탄서원에 배향
출생지 손기양 출생지 - 경상남도 밀양시 용성리
외가|처가 손기양 외가 -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조일리
부임|활동지 손기양 부임지 - 서울특별시
부임|활동지 손기양 부임지 - 경상북도 영천시
부임|활동지 손기양 부임지 - 경상북도 경주시
부임|활동지 손기양 부임지 - 경상북도 영천시
부임|활동지 손기양 부임지 - 경상남도 창원시
묘소|단소 손기양 묘소 - 경상남도 밀양시 용성군
사당|배향지 칠탄서원 -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미촌리
성격 문무관인
성별 남성
본관 밀양
대표 관직 신녕 현감|성균관 전적|경주 제독|영천 군수|창원 부사

[정의]

조선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서 왜적에 맞서 싸운 문신.

[가계]

손기양(孫起陽)의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경징(景徵), 호는 오한(聱漢)·송간(松磵)이다. 아버지는 생원 손겸제(孫兼濟), 어머니는 영산신씨(靈山辛氏)로, 신취(辛鷲)의 딸이다. 첫째 부인은 야로송씨(冶罏宋氏)로, 처사 송근(宋瑾)의 딸인데 후사가 없었다. 둘째 부인은 우계이씨(羽溪李氏)로, 첨지중추부사 이후린(李厚麟)의 딸이다.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손현(孫𦆴)이고, 사위 둘은 권도(權燾)와 찰방 이돈(李墩)이다.

[활동 사항]

손기양은 1559년(명종 14) 6월 20일에 경상북도 밀양시 용성리(龍城里)에서 태어났다. 1585년(선조 18)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8년(선조 21)에 문과에 급제한 뒤 신녕 현감, 성균관 전적, 창원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호거산(虎踞山) 아래에 진을 쳐 병마절도사 박진(朴晋)[1560~1597]과 함께 작원(鵲院)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다. 1594년(선조 27)에 임영(臨瀛)의 적이 운문산(雲門山)에 출몰하자, 면현(綿峴)에서 매복했다가 적장을 사살하여 그 예봉을 꺾었다. 1597년(선조 30)에 다시 침입해 온 왜적이 미친듯이 날뛰며 유린하자, 승려 유정(惟政)[1544~1610]과 함께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을 지키며 왜적을 물리쳐 적의 대군을 막았다.

1601년(선조 34)에 경주 제독에 부임했다. 1603년(선조 36)에 영천 군수에 부임하였다. 당시 영천의 풍속으로 중춘(仲春)[2월]에 영등(盈騰)하는 놀이가 있는데 남녀가 난잡하게 춤추고 노래하였다. 이에 「풍신설(風神說)」을 지어 음란한 풍속을 혁파하였다. 1603년(선조 36) 이후 양친의 상을 당하여 6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복제(服制)를 마친 뒤에 다산(茶山) 아래에 집을 짓고 도학을 밝히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항상 대나무 장대를 들고 도롱이를 걸친 채 낚시로 여생을 보내다가 1617년(광해군 9) 1월 11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59세였다.

[학문과 저술]

손기양은 급제한 지 3년 뒤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한양에 있을 때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와 날마다 『주자서절요』를 강론하여 그 핵심을 밝혔다. 평소 독서할 때 『논어』를 유난히 탐독하여 벼슬살이할 때에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만년에는 『주역』을 좋아하여 먹고 자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집에 간직한 성리서를 서로 참조하며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예설(禮說)을 직접 써서 자신을 단속하고 집안을 다스리는 법도로 삼았다. 저서로는 임진왜란 때 『공산지(公山誌)』를 지어 충분(忠憤)의 마음을 담았고, 문집으로 『오한집(聱漢集)』이 전한다.

[묘소]

손기양의 묘소는 경상남도 밀양시 용성리의 국화산(菊花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손기양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844년(헌종 10) 지방유림의 공의로 칠탄서원(七灘書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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