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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538
한자 李榮
영어공식명칭 Lee Yeong
이칭/별칭 현보(顯父),괘편당(掛鞭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구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93년 2월 10일연표보기 - 이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51년 - 이영 가선대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53년 - 이영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54년 - 이영 북병사(北兵使)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55년 - 이영 병조참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58년 - 이영 제주목사 임명
몰년 시기/일시 1563년 2월 15일연표보기 - 이영 사망
출생지 이영 출생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이영 거주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묘소|단소 이영 묘소 - 대구광역시 동구 내동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이영 배향지 -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 지도보기
성격 무관
성별
본관 영천
대표 관직 가선대부|병조참판|제주목사

[정의]

조선전기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출신 청백리로 이름난 무신.

[가계]

이영(李榮)의 자는 현보(顯父), 호는 괘편당(掛鞭堂), 본관은 영천이다. 아버지는 증병조참판(贈兵曹參判) 이순손(李順孫)이고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월성최씨(月城崔氏) 참군(參軍) 최한(崔瀚)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영은 1514년(중종 9) 21세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1545년(인종 1) 정평부사로 치적(治績)이 크게 드러나 관찰사가 조정에 보고하여 통정대부가 되었다. 1551년(명종 6)에 가선대부에 올라 회령부사가 되었는데 치성(治聲)이 임금에게 들리게 되었다. 이때 조정에서 청렴한 관리 43인을 선발하였는데 이영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1553년(명종 8)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듬해인 1554년(명종 9)에 북병사(北兵使)로 여진족을 잘 다스렸다.

1555년(명종 10)에 병조참판으로 내직으로 들어올 때 명종 임금이 선전관을 보내어 행장(行裝)을 점검하게 하였는데 다만 헤진 이불 한 채만 있을 뿐이었다. 임금께서 “그대의 청백(淸白)은 가히 일월(日月)과 빛을 다투도다”라고 하였다. 1558년(명종 13)에 제주목사가 되어 청렴하고 공평하게 잘 다스려 칭송을 받았다. 돌아올 때 손에 있던 편[鞭: 말채찍] 하나도 관(官)의 물건이라 하고 관청의 벽에 걸어두고 돌아왔다. 이로써 괘편당(掛鞭堂)이라는 호(號)를 얻게 되었다.

[학문과 저술]

이영이 남긴 「병중에 느낌이 있어[병중유감(病中有感)]」, 「타계한 유절도사를 애도함[만유절도(挽柳節度)]」, 「타계한 부인 송씨를 슬퍼함[만부인송씨(挽夫人宋氏)]」 시 3수가 『괘편당실기(掛鞭堂實紀)』에 수록되어 있다.

[묘소]

이영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동구 내동(內洞)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영은 1729년(영조 5)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 청백사에 제향되었으나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앞 동산에 2010년 건립된 현양비(顯揚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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