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39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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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石井染物工場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향촌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노광 |
[정의]
개항기 대구시 중구 향촌동에 있었던 염색 업체.
[내용]
1890년부터 1910년에 이르는 20여 년은 개항장을 중심으로 한 대외무역이 발전한 반면 국내 가내수공업은 몰락하여 갔다. 이 시기는 새로운 근대적 공장제공업이 생성 발전하는 조선 공업의 여명기였다.
공업의 여명기에 대구의 직물공업은 서울 지역보다 공장제 직물 공장 설립이 10년 이상 늦었다. 일제가 1906년에 통감부 설치 이후에 잠업 증산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각종 직물업을 독점하여 하청 생산 체제로 조직 기반을 정비 강화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07년 5월 대구광역시 중구 향촌동에 일본인 자본가 석정주길(石井朱吉)에 의하여 염색업 중심의 석정염물공장이 설립되었다. 자본금은 100원, 직원은 3명[한국인 1명과 일본인 2명]이었다. 석정염물공장은 1906년 설립된 기구표백공장(機具漂白工場)과 1907년 설립된 제직 실습 중심의 전습소기공장과 함께 대구 지역 내 공장제 섬유공업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염색 가공업은 섬유 제품의 부분 공정 혹은 마무리 공정으로 대구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대구광역시의 근대적 염색공업은 가내수공업 형태였지만 발로 작동하는 족답기를 사용한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족답기로 직물을 짜던 수공업 시절에는 염색 기사의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공장제 공업 형태 이전이기 때문에 염색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대다수가 신천에서 드럼통을 잘라 가마솥을 만들어 염색을 한 가내공업 형태였다.
대구광역시에 근대 공업이 입지하기 시작한 것은, 1904년 경부선 철도 개통과 1906년 대구석성의 철거, 그리고 토착 지주의 자본과 일본 유입 자본 간의 상권 마찰이 일어나면서, 일본 자본과 기술이 중심이 되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민족자본도 전통적인 섬유 수공업을 고수하면서 근대산업으로 승계하려고 하였지만,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의하여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