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택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460
한자 趙宅奎
영어공식명칭 Jo Taekgyu
이칭/별칭 사정(士貞),근암(芹庵)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대구광역시 서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도성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45년연표보기 - 조택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79년 - 조택규 이락서당 건립에 동참
몰년 시기/일시 1820년연표보기 - 조택규 사망
출생지 원대 - 대구광역시 서구 원대동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원대 - 대구광역시 서구 원대동 지도보기
수학|강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학자
성별 남성
본관 함안(咸安)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출신의 학자.

[가계]

조택규(趙宅奎)[1745~1820]의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자는 사정(士貞), 호는 근암(芹庵)이다. 할아버지는 조헌익(趙憲益)이고, 아버지는 조춘경(趙春慶)이다. 동생은 조진규(趙鎭奎)이다. 생육신 조려(趙旅)의 후손이다.

[활동 사항]

조택규는 1745년(영조 21) 대구 원대(院垈)[현 대구광역시 서구 원대동]에서 태어났다. 동생 조진규와 함께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1705~1786]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만각(晩覺) 이동급(李東汲)·면암(俛庵) 이우(李㙖) 등과 학문을 논하며 교유하였다.

영조(英祖)가 만년에 진사시 응시생들을 대궐로 불러놓고 “내가 오래 병들어 음식이 어려우니 어쩌면 좋을꼬?”라고 물었다. 조택규는 “신의 조모가 노환으로 입맛을 잃었을 때 신의 아비가 음식을 올리면 문득 물리치셨습니다. 그때마다 자주 눈물을 흘리며 진상하여, 원기를 손상치 않게 하였습니다. 봉양하는 도리는 귀천의 다름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영조가 말하기를 “너의 조상 조려는 충신이요 너의 아비는 효자이며 너의 말은 선하다”라고 하였다. 조택규는 아버지가 병들었을 때 지극정성으로 봉양하였고,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하루도 성묘를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조택규는 만인소를 지어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문묘 종사를 건의하고 주청하였으며, 1779년(정조 3) 정구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1550~1615]의 유허지에 지역 유림과 뜻을 모아 이락서당(伊洛書堂)을 건립하여 사림의 강학소를 마련하였다. 조택규는 1820년(순조 20)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조택규의 저술로 근암집(芹庵集)이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