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055
한자 巴洞- 溪東精舍- 大邱儒學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구본욱

[정의]

조선 전기 대구 유학의 출발점이자 전경창의 강학소인 계동정사와 대구 유학 이야기.

[개설]

대구유학(大邱儒學)은 전경창(全慶昌)[1532~1585]의 계동정사(溪東精舍)에서 시작되었으며, 계동정사는 대구유학의 출발점이다.

[전경창과 계동정사]

전경창은 1532년(중종 27)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巴洞)에서 태어났다. 전경창의 자는 계하(季賀), 호는 계동(溪東), 본관은 옥산(玉山)[경산]이다. 옥산전씨는 대대로 경산에 살았는데 고려 말 5대조 문평공(文平公) 전백영(全伯英)[1345~1412]이 경산 고모에서 파동으로 이사하였다. 전백영은 고려 말에 과거에 합격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 즉 주로 언관(言官)에 종사하였고, 조선이 개국한 후 새 조정에 출사하여 경상·황해·경기 3도 관찰사와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전경창은 5세에 아버지 장사랑(將仕郎) 전순(全珣)이 타계하고 어머니 김해송씨(金海宋氏)로부터 엄한 가르침을 받았다. 큰할아버지 전린(全璘)[1489~1561]에게 형 전응창(全應昌)[1529~1586], 종형 전윤창(全胤昌)과 함께 수업을 받았다. 전경창은 전린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고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혹 두 형이 먼저 잠을 자면 반드시 깨워서 함께 공부하였으며 조금도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동[15세 무렵] 무렵에 이미 학문이 성취되었다고 한다.

1555년(명종 10) 24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가서 공부하였다. 당시에 향리의 우인(友人)으로는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1519~1592], 연정(蓮亭) 서형(徐浻)[1524~1575],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1529~1584], 남간(南澗) 서식(徐湜)[1530~1593],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1530~1593], 송재(松齋) 주신언(朱愼言)[1539~?] 등이 있었는데 모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전경창의 형과 종형 역시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전경창은 우인들과 교유하며 성리서(性理書) 등을 강론하였으며, 후에 대구 유학[성리학]의 1세대를 이루는 전경창과 우인들은 대구 지역의 유학을 전개하게 된다.

전경창은 30여 세에 안동 예안의 계상서당(溪上書堂)으로 가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전경창이황에게 수업한 것은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수록되어 있다. 전경창은 계상에서 돌아온 후 성주의 가야산으로 들어가 1년 동안 홀로 공부하고 돌아왔다. 당시에 대하여 제자인 손처눌(孫處訥)은 「계동행록(溪東行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늦게 퇴계 이황의 풍모를 듣고 사모하고 감발하였다. 그래서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주자서(朱子書)』를 가지고 가야산에 들어가 문을 닫고 고요히 거처하면서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종일 바르게 앉아 구부려 읽고 우러러 생각하며 침잠반복(沈潛反覆)하며 그 귀추를 연구하여 스스로 터득하기를 기약하였다. 그런 후 한 해가 지나서 돌아왔다.”

손처눌이 기록한 짧은 글에서 전경창이 독실히 학업에 매진한 것을 알 수 있다.

퇴계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고 가야산에 들어가 공부하고 돌아온 이후 전경창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1566년(명종 21) 35세 되는 해에 자신의 서재를 ‘계동정사’라고 하고 강학을 하며 후학을 양성하게 된다.

[계동정사 강학과 대구 유학의 2세대]

전경창계동정사에서 강학할 때 처음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모당(慕堂) 손처눌[1553~1634]과 태암(苔巖) 이주(李輈)[1553~1604], 그리고 조카 엄약재(儼若齋) 전춘년(全春年)[1552~1592]이다. 당시에 손처눌전경창이 살고 있던 파동에서 북쪽으로 5리[약 2㎞] 정도 되는 상동(上洞)에 살고 있었고, 이주상동에 살고 있었다.

손처눌『모당집(慕堂集)』「연보」 14세[1566년] 조에 “가을에 부친 선무랑공(宣務郎公)의 명(命)으로 계동(溪東) 전공(全公) 경창(慶昌)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라고 하였고, 이주의 『태암문집(苔巖文集)』「연보」 11세[1566년] 조에는 “아버지 소재공(疎齋公)의 명으로 전계동(全溪東)의 정사(精舍)에 가서 전춘년(全春年)과 함께 공부하였다”라고 하였다.

1566년에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1550~1615]과 괴헌(槐軒) 곽재겸(郭再謙)[1547~1615]이 계동정사로 찾아와 전경창을 배알하였다. 서사원곽재겸은 각기 다른 시기에 방문하였는데 서사원은 17세였고, 곽재겸은 20세였다. 서사원전경창의 우인인 서형의 아들이며, 대구부(大丘府) 관아(官衙) 서쪽 동산동(東山洞), 지금의 약령시 서쪽에 살고 있었다. 서사원은 부친의 명으로 금호강검단동 압로정(狎鷺亭)으로 가서 채응린에게 취학하였다. 곽재겸은 현풍의 솔례에 살았는데 동구 도동의 처가에 왔다가 찾아온 것이었다. 곽재겸은 병조참판 이영(李榮)의 손서(孫壻)로 31세 되는 해에 외손봉사로 대구에 정착하였다.

전경창서사원에게 “우리 유가(儒家)의 사업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심양성(存心養性)에 있다”고 하고, 『심경』 1부를 주면서 “그대는 모름지기 잘 읽어서 내가 오늘 증정하는 뜻을 저버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 곽재겸에게는 『근사록』 1부를 주면서 “그대는 진실로 이 책을 공부해야 한다”라고 하고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위 사실은 서사원『낙재문집(樂齋文集)』「연보」와 곽재겸의 『괴헌유집(槐軒遺集)』「연보」에 기록되어 있다.

전경창이 관직을 수행 중이던 한양에서 54세로 타계하여 고향으로 운구(運柩)가 돌아왔을 때, 정사철의 아들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1553~1594]은 장문(長文)의 만사(挽詞)를 하였는데 만사의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나의 선생이시여! 맑은 기운이 모여 태어나셨습니다. 그 꽃다운 자태는 난초 같고, 그 맑은 절개는 송백(松柏) 같으셨습니다. 타고난 성품은 순수하고 아름다우셨으며, 흉금은 깨끗하셨습니다. 용모는 여유가 있고 의젓하셨으며, 말씀은 빼어나셨습니다. 사람을 대함에 봄바람같이 따뜻하셨고, 일처리는 엄정하게 하셨습니다. 추원(追遠)으로 효도를 하시고, 우애는 더욱 돈독하셨습니다. … 저 소자(小子)로 말하자면, 비록 기운을 탁하게 타고났으나, 오히려 불초하다고 하지 않으시고, 매양 자상하게 배움을 권면하셨습니다. 아! 나의 정성이 깊지 못하여, 경전을 가지고 배움을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속의 근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였는데, 외람되게 임하셔서 간절히 위로하여 주셨습니다. 나라에 부름을 받아 가신 후로, 항상 그 청덕(淸德)을 사모하였습니다. 고향으로 내려오신다는 말씀을 듣고는, 수레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장차 돌아오시면 의지하여 질문을 하면서, 시골에 거(居)하며 장리(杖屨)를 받들려고 하였더니, 홀연히 부음이 여기에 이르니, 제가 놀라 슬픔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천 리 먼 곳에서 오시는 의형(儀形)[운구]을 생각하며, 북풍을 향하여 통곡하였습니다. 끝나 버렸습니다! 나라를 경영하시던 큰 뜻은, 장차 구원(九原)[무덤] 속에 묻혀 버릴 것입니다.”

정광천은 만사에서 전경창의 인품과 학문, 덕행에 대하여 자세히 말하고 있어 전경창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연정(蓮亭) 류요신(柳堯臣)[1550~1618]은 문집도 없고 전경창에 대하여 남긴 글도 없다. 그러나 류요신연경서원(硏經書院)에서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계동정사와 대구 유학]

대구 유학의 제2세대는 모두 계동정사에서 전경창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곽재겸이 「전경창에게 한 제문」에 의하면 연경서원에서 또한 전경창의 가르침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의 대구를 돌아보니 선비들이 공부할 장소가 없었습니다. 이에 서원의 건립을 부르짖으니 이대용(李大用)[이숙량]이었습니다. 공[전경창]이 오직 이대용을 도와 함께 그 아름다움을 이루었습니다. 터를 잡아 집을 지으니 지묘(智妙)의 물가였습니다. 그윽한 곳에 홀연히 이루어지니 갑자년[1564년] 봄이었습니다. 이를 이루고 경영하여 또한 많은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이전에 없었던 것을 창건하니 현송(絃誦)[공부]할 곳이 있었습니다. 화암(畫巖)[연경서원의 서쪽에 있는 바위]의 봄이 깊고 옥계(玉溪)[서원의 앞을 흐르는 계곡의 이름]의 가을이 깊어 갈 때 학도들이 좇아 유람[遊]하며 시(詩)를 읊고 즐거워하였습니다. 부지런히 학문을 논하며 정성스럽게 권면하고 장려하였습니다.”

전경창은 42세[1573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조정에 출사하였다. 전경창은 성균관학유(學諭), 경주·진주 교수, 영변통판, 예조좌랑,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을 역임하였는데 1585년(선조 18) 54세에 관직에 있던 한양에서 병으로 타계하였다. 전경창이 타계하였을 때 조정의 관인 33인과 향리의 우인과 문인 12명이 만·제문으로 조문하였다.

곽재겸은 『괴헌유집』의 「사우록(師友錄)」에서 전경창을 ‘대구유학의 스승’이라고 하였다. 조선 말 고종조에 활동한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1825~1905]는 “우리 대구의 유학은 계동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어 점점 발달되어 갈대가 타는 듯한 물결과 같이 발전하였는데 선생이 학문을 제창한 공로이다. 우리 고을의 주무숙(周茂叔)[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이다. 그 광풍제월(光風霽月)한 정신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서찬규전경창을 주렴계(周濂溪)에 비유하고 있는데, 대구의 유학이 전경창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전경창연경서원 강학은 파동계동정사 강학이 확대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구 지역의 유학은 계동정사에서 시작되어 연경서원으로 확대되어 이후 대구를 학술과 문화, 교육의 고장으로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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