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458 |
---|---|
한자 | 誠嬪原州元氏 |
이칭/별칭 | 성비(誠妃),성비전(誠妃殿)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나종현 |
혼인 시기/일시 | 1398년 - 성빈 원주원씨 이성계의 후궁으로 간택 |
---|---|
활동 시기/일시 | 1406년 - 성빈 원주원씨 비로 책봉 |
몰년 시기/일시 | 1449년 - 성빈 원주원씨 졸 |
묘소|단소 | 성빈 원주원씨 묘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1-1 |
성격 | 왕비 |
성별 | 여 |
본관 | 원주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의 후궁.
[가계]
본관은 원주(原州). 할아버지는 고려조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원송수(元松壽)이다. 아버지 원상(元庠)은 고려조에 군기시 소윤(軍器寺少尹)을 역임한 후, 조선 개국 후에 벼슬에 종사하지 않다가 태종 대에 검교 참찬 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를 지내고 세종 대에는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동생 원충(元衷)은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와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등을 역임한 바 있다. 시호는 양간(良簡)이다.
[활동 사항]
성빈 원주원씨(誠嬪原州元氏)는 1396년(태조 5) 신덕 왕후(神德王后)가 승하한 후, 1398년(태조 7) 2월 25일 태조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태조가 행행(行幸)할 때 원씨가 남자의 복장을 하고 시종하였다고 한다. 1406년(태종 6) 태조의 후궁들을 봉작하였는데, 이때 성비(誠妃)로 책봉되었으며 태조의 후궁 중 하나였던 유씨(柳氏) 또한 정경 궁주(貞慶宮主)가 되었다. 원씨의 책봉 소식을 듣고 태상왕이었던 태조가 기뻐하였다고 한다. 태종은 태조의 승하 이후에도 원씨에게 물건을 진상하는 등 어머니의 예로 대하며 극진히 섬겼다.
이후 국가의 각종 예식에도 원씨는 왕실의 일원으로 계속 참여하였으나, 예(禮)에 관한 이해가 명확하지 않았던 당시 원씨의 지위 문제는 계속 논란거리가 되었다. 태조가 애초부터 원씨를 계실(繼室)이 아닌 첩으로 대우하였다고 하여 예식 당시의 자리 배정을 두고 논란이 있었으며, 원씨를 비(妃)로 봉한 것은 단지 고려조의 습관을 따라 하였을 뿐, 정후(正后)로서 논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또한 원씨의 사망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는 ‘졸(卒)하였다’고 하여 ‘승하(昇遐)’ 등 존숭의 뜻을 드러내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이러한 지위 문제는 사망 후 상례(喪禮)를 둘러싼 논란으로도 이어졌다. 결국 각종 상구(喪具)는 모두 관(官)에서 갖추게 하되, 종친으로 품질(品秩)이 낮은 사람을 상주(喪主)로 삼게 하였다. 다만 장례는 종친의 상등(上等)의 예(例)를 쓰도록 하여 존숭하는 뜻을 나타내도록 하였다.
[묘소]
방학 사거리에서 우이 계곡으로 진행하다 신동아 아파트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왼편 구릉에 전주 이씨 임영 대군파(臨瀛大君派) 오산군(烏山君) 묘역이 있는데, 이 묘역의 서쪽 끝에 성빈 원주원씨의 묘가 위치해 있다. 임영 대군 이구(李璆)는 세종의 넷째 아들이고, 오산군 이주(李澍)는 임영 대군의 아들이다. 원씨의 후사가 없었던 까닭에 제사를 오산군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여, 원씨의 묘가 오산군 묘역에 위치하게 되었다. 묘는 단분 단독장으로, 묘표·문인석·장명등 등의 옛 석물을 갖추고 있다. 묘표에는 ‘성빈 원주 원씨지묘(誠嬪原州元氏之墓)’라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