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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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景奭 |
이칭/별칭 | 상보(尙輔),백헌(白軒),문충(文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양혜원 |
[정의]
조선 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 정종의 열 번째 아들 덕천군(德泉君) 이후생(厚生)의 6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함풍군(咸豊君) 이계수(李繼壽)이고, 할아버지는 좌찬성에 추증된 이수광(李秀光)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이유간(李惟侃)이며, 어머니는 개성 고씨(開城高氏)로 대호군(大護軍) 고한량(漢良)의 딸이다. 관찰사 유색(柳穡)의 딸 전주 유씨(全州柳氏)와 결혼하였다.
[활동 사항]
이경석(李景奭)[1595~1671]은 1613년(광해군 5) 진사가 되고 1617년(광해군 9) 증광 별시에 급제하였으나 이듬해 인목 대비(仁穆大妃) 폐비 상소에 가담하지 않아 삭적(削籍)[병적이나 학적 따위의 기록을 지워 없애 버림]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승문원 부정자, 검열, 봉교, 춘추관 사관(春秋館史官)을 지냈다.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가 공주로 몽진하게 되자 왕을 호종하였다. 이후 이조좌랑, 이조정랑에 올랐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체찰사 장만(張晩)의 종사관으로서 강원도의 군사 모집과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1629년(인조 7) 가을에 어버이를 봉양하려고 자청하여 양주 목사로 나아갔다. 양주에 있을 때에 오래된 포흠(逋欠)을 모조리 탕감해 주었다. 아전들이 탕감하지 못하도록 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강행하였는데, 그 결과 오랫동안 흩어졌던 백성들을 돌아오게 할 수 있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인조를 호종해 남한산성에 들어갔고, 다음 해 인조가 항복하고 산성을 나온 뒤에는 도승지에 발탁되어 예문관 제학을 겸임하며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을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1641년(인조 19)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 세자(昭顯世子)를 따라 심양으로 가서 대청 외교(對淸外交)를 담당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백헌집(白軒集)』 등의 유집이 50여 권 있다. 조경(趙絅)·조익(趙翼) 등과 함께 『장릉지장(長陵誌狀)』 편찬에 참여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이평리의 방산 서원(方山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