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0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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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石窟庵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기관 단체/사찰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산29-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허인섭 |
건립 시기/일시 | 673년 - 석굴암 의상 창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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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수|중창 시기/일시 | 1935년 - 석굴암 전각 강응담 중축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35년 - 석굴암 김병용 시주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35년 - 석굴암 관세음보살 탱화 김병용 헌납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2003년 10월 1일 - 석굴암 산신도·청자 대접·‘순치 6년’ 명문 기와 서울 역사박물관 기증 |
최초 건립지 | 석굴암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산 |
현 소재지 | 석굴암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 1동 산 29-1 |
성격 | 사찰 |
창건자 | 의상 |
전화 | 02-954-8517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 조계사 소속 사찰.
[건립 경위 및 변천]
석굴암(石窟庵)은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 1동 산 29-1 도봉산에 있는 암자로 673년(문무왕 13) 의상 대사(義相大師)가 창건하였다. 조선 시대에 석굴암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두 차례의 병란(兵亂)을 거치는 동안 외적(外賊)에 대한 방어와 인근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수호하는 병영 사찰(兵僧寺刹)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석굴암 주변의 가마터에서 외적 방어에 필요한 건물이나 방어물에 필요한 기와와 그릇 등을 만들었다.
창건 이후 석굴암은 6차례나 중창(重創)과 폐사(廢寺)의 과정을 겪었다. 세세한 과정은 기록의 미비로 알 수 없다. 다만 암자 주변에서 발견된 ‘순치(順治) 6년 [1649]’ 명문(銘文)의 암악새를 통하여 병자호란이 발발하였던 인조(仁祖) 말과 효종(孝宗) 즉위 초에 석굴암의 중창이 진행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935년에는 당시 석굴암의 화주(化主)였던 승려 강응담(姜應潭)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거사 김병용(金秉龍)의 시주로 전각(殿閣)을 중축(重築)하였다는 말이 전한다. 김병용은 석굴암 증축과 함께 관세음보살 탱화(觀世音普薩幀畵) 한 본을 헌납하기도 하였다.
[활동 사항]
석굴암 기도 법회는 매월 음력 초하루 법회, 매월 음력 축일 저녁 9시 산신 철야 기도, 매월 음력 보름 나한전 인등 기도가 있다. 봉사 활동으로는 매주 일요일[동절기 제외]에 국수 공양을 한다.
[현황(조직,시설 현황 포함)]
석굴암은 법당인 만월 보전(滿月寶殿), 오백 나한전(五百羅漢殿), 범종각(梵鐘閣), 요사(療舍), 석굴 등의 전각이 자리 잡고 있다. 나이가 많거나 직장 생활로 바빠 산에 올라오기 힘든 사람들을 배려하여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에 포교원을 개원하여 언제든지 기도 및 법회에 동참하도록 하였다. 2012년 현재 주지는 승려 유방이고 신도 수는 2,000명 이상이다.
[관련 문물]
암자 주변에서 대량으로 청자와 백자(白磁)·분청사기(粉靑沙器) 파편들이 발견되었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뿐만 아니라 19세기에 제작된 것들도 발견되고 있어 석굴암의 오랜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지금도 석굴암 주변에 산재해 있는 청자 조각[靑磁片]은 고려 중후기에 해당하는 1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굴암의 승려 정재는 석굴암의 역사와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유물들을 전통문화 보존과 계승을 위해 만월 보전에 조성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기에 제작된 산신도(山神圖), 복원 불사(復元佛事) 과정에서 출토된 13세기 후반에 제작된 청자 대접, ‘순치 6년’ 명문 기와를 2003년 10월 1일 서울 역사박물관에 기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