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7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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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禹榮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임나영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있는 덕성 여자 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한 교육자.
[가계]
송우영(宋禹榮)은 1880년 신의주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23세 때인 1903년 김명운(金明雲)과 결혼해 1905년 장녀 송금선(宋今璇)을 낳았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송우영은 어려서 부모와 함께 상경하여, 처음에는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가 경영하는 미국인 학당에 입학하여 영어, 한문, 성경 등을 배웠다. 189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학 교육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제중원(濟衆院)에 입학해서 의학을 배웠다. 이후 1900년에는 무관 학교에 입학하였고 1902년 친위대에서의 견습을 거쳐, 이후 한일 늑약 때까지 육군 장교로 근무하였다.
『대한 제국 관원 이력서』와 『황성신문』 등의 기사에 따르면 송우영은 1902년 육군 참위로 임관하여, 1903년부터 1904년까지 혼성 여단(渾成旅團)과 친위대, 시위대(侍衛隊) 등에서 근무했고, 1905년~1907에는 연성 학교와 무관 학교의 교관, 1907년에는 무관 학교 중대장과 근위 보병 대대 중대장, 육군 보병과 조규 전범기(條規典範紀) 편찬 위원 등을 역임했다고 한다. 한일 늑약 당시에는 육군 참령, 즉 현재의 영관급에까지 승진하였다.
일제 시대에는 사업계에 진출하여 부를 쌓았다. 1902년에는 사업가의 딸인 김명운과 결혼하였고, 1905년에 장녀인 송금선을 낳았다. 송금선은 1925년 일본의 도쿄 여자 고등 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숙명 여자 고등학교, 동덕 여자 고등 보통학교, 이화 여자 전문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송금선은 1930년대 후반부터 친일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여성 대표로서 많은 친일 단체에 가담해서 활동하였다. 마침 1930년대 말부터 여성 운동의 선구자 차미리사(車美理士)가 세우고 운영하던 덕성 여자 실업 학교가 일제의 탄압과 심한 재정난으로 학교의 경영이 어려워지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일제 당국은 학교의 새로운 교장으로 친일적 성향의 송금선을 밀었고, 결국 1940년 8월에 송금선이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송우영은 이듬해인 1941년 2월 재단 법인 덕성 학원의 이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덕성 여자 실업 학교를 후원하여 교지(校地)를 확보하고 교사를 신축하는 등의 일에 참여하였다. 1943년에는 마쯔야마 히데[松山榮]로 창씨개명하였다.
1940년 송금선이 덕성 여자 실업 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한 이후, 덕성 학원의 차미리사 이사장은 학교 운영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송우영은 재단 법인 덕성 학원의 이사로서 학교 운영 경비 조달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1952년 1월 5일, 차미리사 이사장이 노환으로 별세하자 덕성 학원의 제2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56년 2월 25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