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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384
한자 銅雀渡
이칭/별칭 동재기 나루,동작 나루,동작진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차인배

[정의]

조선 시대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한강 남안에 설치되었던 나루.

[개설]

동작도한강 이남 ‘동재기 나루’ 혹은 ‘동작 나루’를 일컫는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동작진(銅雀津)의 명칭으로 인식되고 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나루는 여행자의 나들목이자, 교역장이며, 국가 명령의 통신기관이었고, 군사적 기능을 겸하였다. 또 조세수취 조운(漕運)의 근간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고려와 조선에서는 진도(津渡)를 국가차원에서 설치 관리하였다. 고려조에 한강에는 조강도, 낙하도, 양화도, 사평도, 용진 등이 설치되었는데, 조선이 한양으로 도읍하면서 한강경강(京江)으로 불리며 그 중요성이 증대되었다. 세종 대에는 중요 진(津) 혹은 도(渡)에 종9품 도승(渡丞)을 책임자로 두고, 원활한 운영을 위해 늠급위전(廩給位田)과 진척위전(津尺位田)을 지급하여 자급운영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한강에는 도미진, 광진, 송파진, 삼전도, 신천진, 독도진, 입석포, 두모포, 한강도, 서빙고, 동작진, 흑석진, 노량도, 용산진, 마포진, 서강진, 율도진, 양화도, 공암진 등 20여 개의 나루가 설치되었고, 시기에 따라서 각 나루는 진(津) 혹은 도(渡)로 혼재되어 불리기도 하였다.

[관련 기록]

『속대전(續大典)』과 『대전통편(大典通編)』에는 한강 나루 중 국가가 관리하는 진도를 11개소로 열거하고 있으나, 교통수요 등에 따라 그 수는 가감되었다.

동작진도 조선 중후기 노량진의 이용수요가 급증하게 되면서 진도 관리체계로 편입되었다. 인근 노량, 양화 등이 도(渡)로 편재된 바는 있으나 동작나루동작도(銅雀渡)로 정식 편재된 바는 없다. 다만, 정약용동작나루를 이용했던 조선 묵객(墨客)들의 시문에 ‘동작도’의 표현이 다수 등장한다.

[내용]

진도체계에 편입되면, 국가에서는 관선(官船)인 진선(津船)과 인원을 배치하게 되는데, 조선 후기 기록에서 그 수효를 살펴보면 광진 4척, 송파진 9척, 삼전도 3척, 신천진 2척, 양화도 9척, 공암진 5척, 철관진 1척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한강도와 노량도는 각 15척이 배치되어 두 나루가 가장 크고 통행량이 가장 많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한강도, 노량도의 수요를 분산하여 두 나루의 인근에 서빙고진과 동작진을 추가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한강도와 노량도에서 각 5척을 새로 편입된 서빙고진과 동작진에 이동 배치하게 되었다.

동작진은 진도체계에 편입되기 이전에도 사선(私船)이 운행되던 나루였다. 한강에는 국가가 직접관리 운영하는 진도 외에도 민간이 운임을 받고 도강을 해주는 나룻배 나루들이 많이 있었는데, 동작진도 그 중 하나였다. 관에서 운행하는 진선은 무료로 이용이 가능하기는 했지만 기찰이 심하고, 또 일부 관원들의 횡포가 있어, 사람들은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민간 나룻배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던 까닭이다. 또 동작나루는 남태령을 지나 과천, 수원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경로였기에 이용자들이 많았고, 현재 현충원이 위치한 동작진 언덕에는 관사(館舍)를 비롯해 많은 여관들이 운영되었다.

[변천]

동작진에는 진선이 배치된 이후에도 사선의 운행이 지속되었으나, 한강에 다리들이 설치되면서 나루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동작나루 지역은 조선 시대에 경기도 과천현(果川縣), 일제 강점기에 시흥군, 경성부 영등포에 속하였다가 1946년 이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관악구 관할을 거쳐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국립 현충원 길 건너편 동작역 4번 출구 인근에 동재기 나루터 표석이 세워져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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