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덕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583
한자 姜碩德
이칭/별칭 대민(戴敏),완역재(玩易齋),자명(子明)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선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95년연표보기 - 강석덕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44년 - 강석덕 호조참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45년 - 강석덕 사헌부 대사헌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47년 - 강석덕 개성유수 부임
몰년 시기/일시 1459년연표보기 - 강석덕 사망
묘소|단소 강석덕 묘소 -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내리 산173-3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진주
대표 관직 대사헌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인 한강변 남쪽 언덕에 노한이 세운 정자에 ‘효사정’이라는 이름을 붙인 조선 전기 문신.

[개설]

강석덕(姜碩德)[1395~1459]이 ‘효사정’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배경은 효사정을 건립한 노한과의 관계를 통해 알 수 있다. 강석덕노한의 아들 노물재(盧物載)는 동서간이었다. 노한은 효성이 지극해서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후 여묘살이까지 하였다. 하지만 어머니를 잃고 상심한 마음에 그대로 여묘살이하던 곳에 살게 되었다. 노한이 살던 집 근처에 지은 정자가 효사정이다. 강석덕이 정자에 들렀을때 노한이 직접 정자이름과 기문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요청을 받은 강석덕이 ‘효사정’이라고 이름을 정하였다. 기문은 작성하지 못하였는데 이후에 강석덕의 아들인 강희맹이 기문을 지어 이와 같은 사정을 자세히 밝혔다.

[가계]

강석덕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명(子明), 호는 완역재(玩易齋)이다. 아버지는 동북면도순문사 강회백(姜淮伯)이며, 세종의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아버지인 심온(沈溫)의 사위이다. 아들은 강희맹(姜希孟)이다.

[활동 사항]

강석덕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태종 때에 음직(蔭職)으로 계성전직(啓聖殿直)에 임명되었다. 세종 때 지양근군사(知楊根郡事)에 여러 차례 제수(除授)되었는데, 치적(治績)이 제일이었다고 평가받았다. 인수부 소윤(仁壽府少尹)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승진되고,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 이후 1444년에 호조참판(戶曹參判)을, 1445년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맡았다. 다음해에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국상이 있을 때 산릉도감(山陵都監) 제조(提調)를 담당하였다. 이후 이조참판(吏曹參判)·형조참판(刑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1447년에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나갔다가 1449년에 중앙관으로 들어왔다. 문종이 즉위한 후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임명되었다. 세조가 즉위한 다음해에는 원종공신에 올랐다.

[학문과 저술]

강석덕은 성품이 청렴하고 강개하며 옛것을 좋아하고 여러 서체의 글씨가 모두 정밀하였다고 한다. 『완역재집(玩易齋集)』을 저술하였다.

[묘소]

강석덕의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내리 산173-3에 있다.

[상훈과 추모]

강석덕의 시호는 대민(戴敏)으로, ‘대(戴)’는 전례(典禮)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고, ‘민(敏)’은 옛것을 좋아하고 게으르지 않다는 의미이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2.12.22 내용 수정 강석덕의 동서 노한을 노물재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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