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590
한자 盧閈
이칭/별칭 유린(有隣),효사당(孝思堂),공숙(恭肅),문희(文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선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76년연표보기 - 노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03년 - 노한 승추부 좌부승지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05년 - 노한 동지총제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32년 - 노한 의정부 찬성 제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세기 초 - 효사정 건립
몰년 시기/일시 1443년연표보기 - 노한 사망
묘소|단소 노한 묘소 -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윗도장2길 64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교하
대표 관직 우의정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인 노량 나루터 언덕에 효사정을 세운 조선 전기 문신.

[개설]

노한(盧閈)[1376~1443]은 고려 말 우왕 때 태어나 세종 때 사망하기까지 조선 전기에 활동한 문신이다. 노한효사정을 세운 배경은 정자의 명칭에서 나타나듯 효심에서 비롯되었다. 노한은 ‘효사당’이라는 호에서 알 수 있듯이 효성이 극진해서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여묘살이까지 하였다. 여묘살이가 끝난 후에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집을 짓고 살다가 정자까지 지은 것이 효사정의 시작이다. 정자는 집 북쪽 강가에 깎아지른 둔덕 위에 세워졌다. 노한은 아들 노물재(盧物載)의 동서간인 강석덕에게 정자의 명칭을 직접 부탁하여 ‘효사정’이라 정하게 되었다. 68세를 일기로 사망한 후, 노한의 묘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인 조선 시대 금천현 고사리에 있다가 1940년대에 경기도 파주군으로 이장되었다.

[가계]

노한의 본관은 교하(交河), 자는 유린(有隣), 호는 효사당(孝思堂)이다. 첨의정승(僉議政丞) 노책(盧頙)의 증손이고, 할아버지는 창성군(昌城君) 노진(盧稹), 아버지는 대호군(大護軍) 노균(盧鈞)이며, 어머니는 한성부원군(漢城府院君) 왕수(王琇)의 딸이다. 좌의정 민제(閔霽)의 딸과 혼인하여 태종과 동서간이다. 민제는 태종의 장인으로, 노한의 아내인 민씨는 태종의 비인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이다.

[활동 사항]

1391년(공양왕 3) 음서(蔭敍)로 등용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여러 번 승진해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거쳐 1403년(태종 3)에 승추부 좌부승지(承樞府左副承旨)가 되었고, 다음해에 이조전서(吏曹典書)가 되었다가 곧이어 경기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로 나갔다. 1405년(태종5) 동지총제(同知摠制)를, 다음해에 풍해도 도관찰사(豊海道都觀察使)를 지낸 후 1408년에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다.

노한의 관직생활은 한성부윤에 임명된 다음해로부터 14년간이나 멈췄다. 처남인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 형제가 탄핵을 받아 사사(賜死)되자, 노한도 연좌되어 파직되었기 때문이다. 복직된 것은 1422년(세종 4)에 상왕으로 있던 태종의 뜻에 따라 세종이 한성부윤에 임명한 때부터이다. 이어서 형조판서에 승진된 후, 의정부 참찬·판한성부사를 거쳐, 1432년(세종 14)에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으로 승직되었다. 1434년에 찬성(贊成)으로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겸하였고, 다음해에 우의정이 되었다. 1437년에 사직하였다. 6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묘소]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인 경기도 금천현(衿川縣)의 북쪽 20리에 노한의 묘가 있었다. 1940년대에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백석리로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공숙(恭肅)으로, 예절 바르게 손님을 대한 것을 공(恭)이라 하고, 마음이 정하여져서 결단성 있는 것을 숙(肅)이라 한다. 노한은 천성이 활달하고 사람을 대접하는 데에 너그럽고 화평하였다고 당대에 평가받았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3.04.07 노한의 묘 현재 지명 수정 동작구 노량진동에서 동작구 대방동으로 수정
2022.12.23 내용 수정 노한 묘 원소재지를 노량진동에서 대방동으로 수정, 강석덕의 동서를 노한에서 노물재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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