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642
한자 朴烈
영어공식명칭 Bak Ryeol
이칭/별칭 혁식(赫植),박준식(朴準植)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조은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2년 3월 12일연표보기 - 박열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2년 - 박열 함창공립보통학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 박열 문경에서 3·1 만세시위운동 전개
수학 시기/일시 1919년 10월 - 박열 일본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21년 11월 - 박열 흑도회 결성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2년 12월 - 박열 흑우회 조직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3년 4월 - 박열 불령사 조직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3년 10월 - 박열 일본 경찰에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0월 - 박열 박열 석방
활동 시기/일시 1946년 1월 - 박열 신조선건설동맹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46년 10월 - 박열 재일조선거류민단 발족
활동 시기/일시 1949년 5월 - 박열 한국으로 영구 귀국
몰년 시기/일시 1974년 1월 17일연표보기 - 박열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4년 - 박열 박열 국립서울현충원 위패 봉안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89년연표보기 - 박열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출생지 박열 출생지 - 경상북도 문경시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위패봉안관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재일조선거류민단 단장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위패가 봉안된 독립운동가.

[개설]

박열(朴烈)[1902~1974]은 일본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 운동단체인 흑우회(黑友會), 불령사(不逞社) 등을 조직하고 1923년 일왕 처단의거 계획 중 일경에 피체되어 22년 간 옥고를 치렀다.

[가계]

박열은 경상북도 문경군 호서남면(戶西南面) 모전리(茅田里)에서 아버지 박지수(朴芝洙)와 어머니 정선동(鄭仙洞)의 1녀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활동 사항]

박열은 1902년 3월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서당교육을 받다가 10세 때 함창공립보통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중학교] 사범과에 진학했다. 3·1운동 때 고향 문경으로 내려가 4월 초부터 중순까지 3·1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10월 일본으로 망명해 도쿄에서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 다니며 각종 노동에 종사했다.

도쿄 최대의 한인 노동단체인 조선고학생동우회(朝鮮苦學生同友會)에 가입해 유학생인 김약수(金若水), 백무(白武) 등과 간부를 역임했다. 의혈단(義血團)을 조직하고 친일 행위자 응징에 나섰다. 1921년 11월에는 원종린(元鍾麟), 김약수 등과 흑도회(黑濤會)를 결성하고 기관지 『흑도』의 발간을 맡았다. 1922년 12월에는 홍진유(洪鎭裕), 장상중(張祥重) 등 아나키스트들과 흑우회(黑友會)를 조직했다.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기관지 『후토이센징[太い鮮人]』과 『현사회』, 『민중운동』 등을 발간했다. 1923년 4월 중순에는 한인 15명과 일본인 6명으로 구성된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했다.

1923년 10월 중에 있을 일본 히로히토[裕仁] 태자의 결혼식에 폭탄을 던지는 투탄의거를 계획하고, 불령사 회원 최영환(崔英煥)을 통해 다물단에서 폭탄을 구했다. 일왕폭살계획 추진 준비 중 관동대지진이 발생하면서 경찰에 검속되었고 검찰 취조 과정에서 폭탄 구입 사실이 알려져 1923년 10월부터 1925년 6월까지 총 21회에 걸친 신문조사를 받았다. 조선의 예복과 사모관대 차림으로 법정에 출두한 박열은 자신의 세계관과 반천황제 투쟁의 의의를 밝히며 법정투쟁을 벌였다.

1926년 3월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다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1945년 10월 석방 때까지 22년 2개월 간 수감되었다. 옥고를 마친 후 1946년 1월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46년 5월에는 김구의 부탁으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의 유해송환 책임을 맡았다. 10월 재일조선거류민단을 발족시켜 초대 단장을 맡았다. 1949년 5월 영구 귀국 후 서울에 머물다가 6·25전쟁 때 납북되어 1974년 1월 평양에서 사망했다.

[묘소]

1974년 1월 17일 국립서울현충원 위패봉안관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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