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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부터 4월까지 충청북도 음성군 일원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 일제의 한국 강점과 무단통치에 대항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충청북도 음성군 일원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1919년 3월 하순부터 4월 상순에 걸쳐 군내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에서는 초전리 서당에 다니던 김영익·정민영·최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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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4일부터 7월 10일까지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적으로 전쟁을 도발하여 파죽지세로 남하하였다. 국군 제6사단 제7연대는 장호원에서 충청북도 음성군 방향으로 남하하는 북한군 제15사단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7월 4일, 음성군 방면으로 이동하여 방어망을 구축하고 북한군에 대비하게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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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소여리 무극전적국민관광지 안에 조성된 전승기념관. 감우재전승기념관은 6·25전쟁 때 한국이 최초로 승전하여 국군의 사기를 드높였던 곳인 무극전적국민관광지 내에 설립되었다. 당시에 분투한 장병들의 공훈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적극 활용하고자 설립하였다. 감우재전승기념관은 모두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은 208m², 2층은 138㎡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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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자는 명여(命汝). 아버지는 만오(晩悟) 권종석(權鍾奭)이다. 1868년(고종 5)에 출생하였다. 1885년(고종 22) 무과에 급제하여, 1890년 선전관, 1891년 훈련원주부, 1892년 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899년 31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사창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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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재학은 1919년 4월 1일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한내장터에서 김을경, 이중곤, 추성렬, 이교필, 이용호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동하였다. 권재학은 수백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소이면사무소로 달려가 만세 삼창을 하였다. 이때 왜경이 김을경, 이중곤을 연행하자 주재소에 가서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음성에 거주하던 일본인 후루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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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동환은 황해도 봉산에서 출생하여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당시 20세였던 김동환은 3월 20일에 맹동면 주민 수백 명이 만세 삼창을 하며 시위를 하자, 천도교의 독립선언서를 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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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서 태어나 음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41년 윤규섭, 유근배, 남상엽, 최규동 등과 흑민단(黑民團)이라는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흑민단의 주요 활동은 배일사상 고취와 선전, 독립자금 모금, 중국의 독립운동 단체와 연락 등이었다. 그러던 중 1942년 만주에서 유근배가 윤규섭에게 보낸 비밀 편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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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안동(安東).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초천리 148번지에서 김수홍(金壽洪)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3월 27일 충청북도 음성읍 초천리에 있는 백양서당(栢陽書堂)에 다니던 정문영, 정대영, 최만득 등과 음성 장날에 맞춰 시위를 벌였고, 3월 28일에도 음성시장에서 시위를 하였다. 4월 6일 밤 산 위에서 약 5백여 명의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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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김원조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경기도 이천에서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왜경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후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군정부 광복군에서 활약하였으며,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서울에 연락 기관을 설치하고 동지들과 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 1920년에 경기도 이천에 돌아와 활약하다가 12월 28일 왜경에 체포되어 예심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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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송곡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김원조(金遠祚)의 묘. 김원조는 경기도 이천 사람으로 1919년 3·1운동 때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연락 기관을 서울에 설치하기 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1919년 12월 28일 체포되었다. 10년형을 언도받아 복역 중이던 1922년 4월 15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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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을경은 1919년 당시 21세였다. 4월 1일 이중곤 등과 함께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한내 장터에서 만세를 삼창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또한 군중을 선도하여 소이면사무소로 몰려가서 면장인 민동식도 시위에 가담하게 하였다. 5월 22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하였다. 김을경은 67세에 사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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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에 있는 조선 말기 문신 김재은(金在殷)의 선정비. 김재은은 고종 때의 관리이다. 1904년(광무 8)에 중추원의관(정3품)을 거쳐 1905년 정2품 가선대부(正二品嘉善大夫)로 충주군수 서주임관1등(敍奏任官一等)에 임명되었다. 내부대신육군부장훈1등(內部大臣陸軍副將勳一等) 이지용(李祉鎔)이 발급한 충주군수로 임명받았을 때의 교지(敎旨)가 국립중앙도서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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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주, 자는 성원(聖遠). 십청헌 김세필(金世弼)의 13세손이다. 1882년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서 김석용(金奭容)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김필제는 한일합병이 되자 서울로 상경하여 의거 활동을 하다가 왜경에게 쫓기게 되었다. 이때 왜경이 난사한 총탄에 오른팔을 맞았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서재필 박사의 도움으로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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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경성부 수하정보통학교의 소사로 있던 당시 26세 서대순(徐大順)의 협조를 얻어 배운성과 함께 1919년 4월부터 10월까지 은밀히 독립운동 목적을 기재한 문서를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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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음성향교 앞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의 구장 남궁은의 송덕비. 묘표형의 비석으로 가첨석은 없다. 전체 높이는 119㎝, 앞면 폭 46㎝, 측면 폭 19㎝의 규모이다. 비신 중앙에 ‘삼구장남궁은송덕비(三區長南宮恩頌德碑)’라 쓰여 있고, 왼쪽에 송덕 사실을 4언시로 옮겨놓았다. 사언시의 내용은 “십년 간을 부지런히 근무하였으니 좋도다 그 말씀이여! 사사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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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23년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노리 노래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남윤원(南允源)이다. 음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41년 윤규섭·유근배·최규동 등과 흑민단(黑民團)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펼쳤다. 1942년 체포되어 대전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약 1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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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889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소여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남호중(南鎬重)이다. 천도교 음성교구에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하였다. 1923년 종리원(宗理院) 종리사에 임명되었고, 교인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모금한 쌀을 천도교 중앙회에 보내는 직책을 맡았는데, 그 쌀이 독립군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면서 1925년 7월 일본 경찰에 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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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무신. 본관은 의령(宜寧). 충장공 남연년(南延年)의 9대손이자, 청양현감 남병추(南秉樞)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인은 함평이씨로 이필헌(李弼憲)의 딸이다. 1875년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노리 천복동에서 출생하였다. 1891년(고종 2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1893년(고종 30) 별군직참하, 1897년(고종 34) 친위대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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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시에서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국권회복운동과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 음성 지방은 1905년의 중기 의병 때부터 의병 활동과 관련한 구체적인 기사들이 보이는데, 특히 1907년 구한국군대의 강제 해산 이후 봉기한 후기 의병에서 더욱 활발한 양상을 보인다. 또한 3·1운동 때에는 군내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지는 등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조선 후기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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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한벌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박갑동의 치적을 기리는 비. 박갑동 시혜비는 1940년에 세워진 비(碑)로서, 박갑동은 농민들에게 자신의 토지를 빌려주고 소작료를 적게 받거나 면제해 주는 등의 자선 사업을 한 인물이다. 총 높이는 127㎝로, 3단으로 이루어진 비의 규모는, 비신(碑身)의 경우 높이 112㎝, 앞면 45㎝, 측면 18㎝이고, 가첨석(加檐石)은 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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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선비. 본관은 밀양. 자는 경견(敬絹), 호는 입재(立齋). 정조 대의 명신 매곡 박한규의 6세손이다. 아들로 박석원과 박두원이 있다.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하였다. 일곱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로 이주하였다. 15~16세 때 회당 윤응선에게 수학하여 학문에 탁월하였다. 일제의 학정에 세상의 뜻을 버리고 은거하여 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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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제성(朴濟成)[1902~1970]은 박서 장군의 21세 손이고 박중현(朴中鉉)의 아들로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4월 2일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서 민병철, 박영록 등과 만세 시위를 계획, 추진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0일 청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대를 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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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교육자. 박제익(朴齊翼)은 1881년(고종 18) 사립 광명학교를 음성향교 내에 설립하고 아동 교육을 하였다. 1909년 8월 31일 정식 인가를 받아 사립 광명학교를 설립하여 설립자 겸 교장이 되었으며, 보통과와 일어를 가르쳤다. 1910년의 수업 연한은 4년이었고, 교원 3명에 학생 수는 35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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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 본관은 광주. 자는 찬교(讚敎) 또는 원춘(元春), 호는 홍암(弘菴). 시조 반충(潘忠)의 19세손이다. 조부는 설포 반진홍(潘鎭洪), 아버지는 두산 반달순(潘達淳)이다. 부인은 옥구장씨(沃溝張氏)로 장기화(張基華)의 딸과 단양장씨(丹陽張氏)로 장동관(張東觀)의 딸 그리고 순천박씨(順天朴氏)로 박두현(朴斗鉉)의 딸이다. 1903년에 법부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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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음성향교 앞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변중기의 기념비. 변중기 기념비는 1930년대 읍내리 1구장을 역임한 변중기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이다. 변중기는 읍내리 1구장 역임 이외의 행적은 미상이다. 비는 1936년에 세워졌다. 비신(碑身)의 총 높이는 119㎝이며, 앞면의 폭 41㎝, 측면의 두께 15㎝이다. 비석 앞면에는 ‘읍일구장변중기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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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에 있는 성기환(成耆煥)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비. 성기환의 자는 경문, 호는 경은. 본관은 창녕이다. 성기환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가난하게 자랐으나 근검절약하여 살림이 넉넉해지자 흉년에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였다. 충주시에서 청주시로 가는 국도 36호선 변인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당2리에서 500m 못 미친 도로변 오른쪽에 위치한다. 성기환 구휼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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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말기 음성현감 송규복을 기리는 비. 송규복 애민선정비는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에서 충주 쪽으로 가는 옛 국도 변에 위치한 음성향교 앞에 있다. 향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던 장소이므로 선정비나 불망비 등이 많이 세워져 있다. 비석은 지붕돌이나 이수(螭首) 없이 윗부분을 둥글게 처리한 일반형 석비로 화강암 1매석이며 높이 115㎝의 비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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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역사가.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자현(子賢), 호는 하석(荷石). 득우재(得寓齎) 송상철(宋相哲)의 후손으로, 송헌삼(宋憲三)의 손자이며, 정와(定窩) 송달용(宋達用)의 아들이다. 묘소가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포리에 있다. 송석민은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포리에서 출생하였다. 형 송석규(宋錫珪)와 함께 회당(晦堂) 윤응선(尹膺善) 문하에서 한학을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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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신억검(申億劍)은 1919년 4월 1일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중동리 한내 장날을 이용하여 김을곤(金乙坤), 이교필(李敎弼), 추성렬(秋成烈)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수천의 시위 군중은 이들의 지휘에 따라 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흥분한 군중은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해졌다. 같은 날 오후 3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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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1910년 5월 12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7천 석 지기 갑부로 독립운동을 하던 신조준의 딸로 출생하였으며, 선천보성여학교 2학년 때 권고퇴학을 당하고 교회 어른들의 주선으로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장현근과 19세에 결혼하였다. 결혼 1주일 만에 남편이 사라져 수소문 끝에 여운형의 소개를 받고 신의주에서 만주로 가려다가 안창호와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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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유학자.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사현(士賢), 호는 직당(直堂).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으로, 조부는 신태원(申泰元)이며, 아버지는 가정(稼亭) 신만균(申萬均)이다. 어머니는 함평이씨로 이설서(李卨緖)의 딸이다. 1869년(고종 6) 12월 8일 경기도 여주군 소곡리에서 출생하였다. 8세에 외종조 국포(菊圃) 이직서(李稷緖)에게 배웠으며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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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4월 1일 죽산공립보통학교에서 양재옥(梁在玉) 등과 함께 학생 50여 명을 모아 독립만세를 외치고, 1919년 4월 2일 전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안성군 죽산 지방의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동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8월 28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1년 6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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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안창렬은 1919년 4월 1일 김을경, 이중곤, 권재학, 추성렬, 이교필, 이용호 등이 주도하는 한내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만세 운동이 진행되던 중 군중이 던진 돌에 주재소의 유리창이 깨지는 등 사태가 위급해지자 충주수비대가 파견되었고, 이들의 무자비한 발포로 임신부를 비롯하여 6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4명이 부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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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2월 1일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했다가 1920년 안도현(安圖縣)으로 이동하여 대한독립군 편성 때 독립군사령부 조직책으로 활동하고, 1924년 길림성에서 독립군 재건에 활약하며 자유 독립 사상을 고취한 「자유가(自由歌)」를 작사, 작곡하였다. 1924년 길림성에서 독립군 재건에 활약하고, 1930년 한족자치연합회와 생육사(生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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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육영 사업가. 약산(藥山) 염병화는 편모슬하의 어려운 생활 속에서 가산을 일으켰다. 일제강점기에 한글을 보급하기 위하여 평곡유치원, 일신서당(日新書堂)을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육영 사업에 이바지하였다. 광복 후에 평곡공립국민학교를 설립하는 데 재산을 기증하였고, 재정 운영난을 겪자 염병화가 경영하던 채석장 수입 전액을 학교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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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유학자.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석농(石農). 숙헌공(肅憲公) 오빈(吳䎙)의 8세손이다. 어려서부터 재예가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간재(艮齋) 전우(田愚)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0세에 사서육경을 통달하고, 20세 이전에 여러 책을 두루 익혀 문장이 널리 알려졌다. 사학(史學)에 정통하여 역사의 대가인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도 경의를 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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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21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청(柳淸)이다. 1934년 음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41년 윤규섭과 모의하여 남상엽·김시중·최규동 등을 규합한 뒤 흑민단이란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흑민단을 통하여 배일사상을 선동·선전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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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4월 1일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한내 장터에서 김을경(金乙卿), 이중곤(李重坤), 권재학(權在學) 등 6명이 주동한 3·1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시위 군중에 앞장서서 만세 시위를 더욱 가열시켰다. 김을경, 이중곤 등 주동자가 연행되어 소이주재소에 감금되자 격분한 군중은 주동자를 석방하라고 주재소를 포위하고, 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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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1928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로 이사 와서, 음성공립보통학교를 수료하고, 서울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동경 일본대학에 입학하여 재학 중에 제2차 세계대전 수행을 위하여 동원령을 공포하고 일본에 유학 중인 한국 출신 대학생들을 학도병으로 동원시키기 시작하자, 이에 반대하여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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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노리에 있는 조선 말기 의령남씨의 유지(遺地)를 표시하기 위한 비(碑). 세손비(世孫碑), 세파비(世派碑), 세장비(世葬碑)는 세족(世族)의 유지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것들로서 성격이 비슷하다. 의령남씨 세손비는 1888년(고종 25)에 세워졌다. 비의 총 높이는 273㎝이며 3단으로 구성된 비의 규모는, 비신(碑身)의 경우 높이 190㎝, 앞면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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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교필은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봉전리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1919년 4월 1일,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한내 장터에서 3·1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벌였다. 주재소를 습격하고 구금자를 탈환하고자 절규하면서 귀가하려는 사람들을 제지하는 등 누구보다도 앞장섰다가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서 6개월을 복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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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20일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내 3·1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서 임백규(林百奎), 유해길 등과 주동이 되어 산 위에서 횃불을 올리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4월 2일 약 6백 명 면민이 각 동리에서 만세를 부르고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천평리 배미에서 임백규, 유해길과 역사적인 거사를 단행하여, 독립 만세를 부르며 면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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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성용은 1875년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선정리에서 이호성(李鎬聖)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우봉, 자는 덕경(德敬)이다. 1919년 4월 2일 밤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선정리 뒷산에서 마을 주민 수십 명과 독립 만세를 부른 후, 약 80여 명의 군중을 지휘하고 천평리 소재 경찰주재소로 달려가 독립 만세를 계속 고창하였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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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4월 1일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한내 장터에서 김을경(金乙卿), 이중곤(李重坤), 권재학(權在學) 등이 주동한 3·1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선두에 서서 군중을 이끌고 소이면사무소까지 행진하였다. 당시 민동식 면장을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토록 권유하고,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계속 독립 만세를 고창하고, 주재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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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말기 음성현감 이원긍의 선정비. 이원긍 선정비는 이원긍 청백애민선정비(李源兢 淸白愛民善政碑)라고도 하며, 1927년에 세워졌다. 이원긍은 1874년(고종 11)에 음성현감이었는데,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리(公履), 호는 취당(取堂)으로 괴산 출신이다. 이두진(李斗鎭)의 아들이며, 조선 말기 3대 국학자의 하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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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4월 1일 김을경(金乙卿)과 함께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한내 장터에서 3·1운동 독립 만세 시위의 거사를 계획하고, 4백여 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소이면사무소에 이르러 김을경과 함께 면장 민동식에게 “너도 조선 사람이니 함께 독립 만세를 부르자”하고 시위 군중과 독립 만세를 외치게 하는 등 활약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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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말기 음성현감 이철응의 선정비. 이철응은 조선 고종 때 음성현감을 지냈다. 그 외의 자세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선정비는 1885년(고종 22)에 세워졌고, 현재 음성향교 앞에 다른 비석군들과 함께 있다. 1단 비석으로 비신(碑身)의 총 높이는 114㎝이며, 앞면의 폭은 42㎝, 측면의 두께는 16㎝이다. 비신 앞면에는 ‘현감이후철응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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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4월 1일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한내 장터에서 김을경(金乙卿), 이중곤(李重坤), 권재학(權在學) 등이 주동한 3·1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소이면사무소로 행진하여 면장을 끌어내어 독립 만세를 외치게 하고 있을 때, 왜경이 주도자를 연행하자 시위가 더욱 격렬해졌다. 시위 군중은 돌을 던져 주재소 유리창을 깨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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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계몽운동가. 사립학교인 통명학교(通明學校)는 현재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에 있는 무극초등학교이다. 1906년 4월 5일 조동환(趙東煥)을 교장으로 무극사립보통학교를 설립하였으나, 1907년 6월 1일 이필영이 설립자 겸 교장이 되어 1909년 8월 31일에 통명학교를 설립하여 인가를 얻어 애국 계몽 운동에 참여하였다. 수업 연한은 4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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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음성군수 이해용의 기념비. 이해용 기념비는 1929년에 세워졌고, 현재 음성향교 앞에 다른 비석군들과 함께 있다. 전체 높이는 182㎝이며 비신(碑身)은 높이가 129㎝, 앞면의 폭 50㎝, 측면의 두께가 22㎝이다. 가첨석(加檐石)은 높이 53㎝이며 앞면의 폭은 79㎝, 측면의 두께가 58㎝이다. 비석 앞면에는 ‘군수이후해용청덕기념비(郡守李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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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에서 1910년 국권 강탈 이후 1945년 광복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통치 시기. 음성군은 1895년(고종 32)에 지방 관제를 23부로 개정할 때 충주부 20개 관할군의 하나인 음성군이 되었다가 이듬해 8도 체재로 정비될 때 충청북도 음성군이 되었다. 그후 1906년 지방제도가 정비될 때 충주군에 소속되었던 13개 면을 이임받아 동도면·남면·원서면·근서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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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20일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에서 3·1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이고, 4월 2일 삼성면 천평리 배알미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고,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습격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서 3년간 복역하였다. 재판 기록을 보면, ‘임백규, 임경순의 선동에 응하여 4월 2일 밤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오산리 소재 면사무소에 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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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삼생리에 있는 조선 말기 장용묵의 불망비. 장용묵은 충신 장충범의 후손이며, 장석영(張錫永)의 아들이다. 자는 성언(聖言)이며 호는 금범(錦帆), 본관은 단양(丹陽)이다. 부모에 대한 효심이 깊었다. 어머니가 병을 앓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삼일을 더 살게 하였다. 흉년이 들어 인근에 기황(饑荒)이 들자 곡식을 풀어 구휼하였다. 장용묵 보폐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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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장현근은 1909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신천리에서 장원기(張遠基)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옥구, 자는 명옥(鳴玉), 이명(異名)은 송진표(宋鎭杓)이다. 개성상업학교 재학 중에 의주 신조준(申肇峻)의 딸 신정숙(申貞淑)과 결혼하였는데, 장인 신조준은 만주에서 독립 항쟁한 인물이다. 1926년 개성상업학교 재학 중 일본인 교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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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에 음성읍 초천리 백양 백양서당(栢陽書堂) 훈장으로 있으면서 당시 서당 학생이던 정민영(鄭玟永), 최만득(崔萬得)과 아들 정대영(鄭大永)의 1919년 3월 28일 음성시장에서의 시위를 도와주는 등 음성 지역에서의 3·1운동에 이바지하였다. 공은 평생 일본인을 ‘왜놈’이라 증오하고 한일합방 후 들어온 양말을 ‘왜말’이라 부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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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민영은 1901년 1월 7일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초천리 881번지[초천로174번길 19-7]에서 문묘 직원이던 정모선(鄭謨善)의 차남으로 출생하였으며, 1970년 12월 6일에 향년 70세로 별세하였다. 1919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초천리 백양서당에 다니고 있던 정민영은 평소 알고 지내던 김영익(金榮翼)으로부터 3·1운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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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890년 9월 27일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에서 출생하였으며, 1971년 11월 28일에 향년 82세로 별세하였다. 1910년 대종교에 입교하여 활동하였으며, 1912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에서 신규식(申圭植)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하였다. 1918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사절단의 자금을 간도 노령에서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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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의병. 시조 정배걸의 31세손이고, 내급사공파의 증좌승지 정인호(鄭仁鎬)의 현손이며, 정인성(鄭寅晟)의 아들로 음성군 금왕읍 내송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자는 군소(君素)이며 본관은 초계이다. 정이헌은 1896년에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 의병진에 가담하여 충주 금목(金目)[금왕읍 쌍봉리] 일대에서 의병의 모집 및 전투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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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백헌(佰憲), 호는 해관(海觀). 아버지는 동래부사를 지낸 정인학(鄭寅學)이다.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태어났으며, 1885년(고종 22) 22살에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하였으며, 4년 뒤인 1889년(고종 26)에는 부교리, 사간을 지내고 이듬해에 응교(應敎), 장령(掌令)을 지냈다. 1891년(고종 28) 28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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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의병. 본관은 초계. 자는 행원(行源), 호는 농은(農隱). 내급사공파의 참봉 정국로(鄭國櫓)의 11세손이다. 조부는 중추부사 정민수(鄭民秀), 아버지는 정인희(鄭寅羲)이다.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내송리에서 출생하였다. 부인은 성주현씨(星州玄氏) 현광일(玄光一)의 딸과 해평윤씨(海平尹氏)이다. 을사륵약 이후 전국 곳곳에서 의병들이 궐기할 때 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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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조관식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1921년부터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4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5년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경기도 경찰간부로 복무하다가, 대한국군준비위원회 부회장으로 창군에 참여하였다. 그 후 이승만 박사의 경호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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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조동환의 비. 조동환의 자는 문옥(文玉), 호는 정암(靜岩)이며,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음성읍 평곡리에서 살았으며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다. 신정왕후(神貞王后) 조대비(趙大妃)와 혈연 관계가 있어, 1910년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에 기용되었고 강원도 춘천재무소 주사가 되었다. 1928년부터 2년간 음성면장을 지냈고,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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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의학 박사이자 해군 장교. 조성두는 1949년 서울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재학 중이던 1951년 해군에 지원·입대하여 종군하다가 1954년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진해(鎭海) 해군병원에서 근무하였고, 1967년 「폐 침수시의 심장 박출량과 혈압의 변동」이라는 논문을 제출하여 서울대학교로부터 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1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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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894년 9월 9일에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임곡리에서 조태영(趙泰永)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서울시 종로에서 살았다. 1950년 7월 15일 6·25전쟁 시에 폭탄에 맞아 57세로 전사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임곡리에 있다. 조윤식은 서울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독학하면서 주권 회복의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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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의병. 본관은 한양. 아버지는 조희윤(趙喜允)이다. 1875년 8월 14일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에서 출생하였다. 조병관(趙炳觀)의 양자가 되었고, 1956년 6월 25일 향년 82세로 별세하였다. 1907년 8월 23일 33세에 조응삼은 관북창의대장(關北倡義大將) 정봉준(鄭奉俊) 휘하에 입진(入陣)하였다. 강원도 원주를 중심으로 100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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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규동은 음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윤규섭, 유근배, 남상엽, 김시중 등과 흑민단(黑民團)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조직이 발각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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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887년 2월 13일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봉전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919년 당시 충청북도 충주군 충주읍 읍내리 409-1번지에 거주하면서 잡화상을 하였다. 1970년 9월 9일에 향년 83세로 별세하였다. 추성렬은 1919년 4월 1일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한내 장터에 운집한 군중에게 독립 만세 운동의 당위성을 설명한 후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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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부친상을 당하여 미처 탈상하지 않았는데 이어서 모친상을 당하여 6년간 시묘살이를 하는데 범이 와서 보호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되자 집에다 ‘이왕가지민하석환(李王家之民河碩煥)’이라고 문패를 달고는 세금도 내지 않고, 호적도 등재하지 않았다. 이에 음성경찰서에 구금되어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내 불응하고 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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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에서 이루어진 1945년 8·15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음성군은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로 충청북도 음성군이 된 이후 1906년 충주군의 금왕면·생극면·대소면·맹동면·삼성면·감곡면 등 6개 면이 편입되었다. 그후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충주군 소이면의 일부가 편입되었고, 1956년 7월 8일 법률 제393호로 음성면이 음성읍으로 승격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