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0182 |
---|---|
한자 | 江陵師範學校 |
영어공식명칭 | Kangnung Teacher School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명주동 50-1[현 명주초등학교 자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류동희 |
성격 | 학교 |
---|---|
주소 | 강원도 강릉시 명주동 50-1[현 명주초등학교 자리] |
설립연도/일시 | 1946년 7월 20일 |
폐교연도/일시 | 1963년 2월 28일 |
설립자 | 국가 |
졸업생(여) | 765명 |
총졸업횟수 | 15회, 총 1,309명 |
[정의]
강원도 강릉시 명주동에 있었던 국립 교육대학.
[교육목표/교훈]
‘자율(自律), 봉사(奉仕), 근실(勤實)’이다.
[설립경위]
해방 후의 부족한 교사와 급증된 취학 아동에 대한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임시적이나마 응급조치가 필요했다. 그 대안으로 일제 때부터 내려온 사범학교의 심상과와 연습과 본과[경성사범학교는 보통과와 본과]에 강습과 혹은 초등교원 양성과를 부설하고 각 시·도에 임시 초등교원 양성소를 1개 내지 5, 6개씩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경북에서는 7개 중학교에까지 사범과를 개설하고 문교부 직할로 중등교사 양성소 또는 양성과를 신설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이어서 보다 효율적이고 영구적인 대안이 요구되었다. 이에 부응해서 고안한 항구적 조치로서는 군정(軍政) 첫해에 들어 경기, 개성, 강릉, 충주, 부산에 새로 다섯 개의 사범학교를 신설하고 다음해에 네 개의 사범학교를 군산, 순천, 목포, 안동에 신설하는 한편, 중등교사 양성을 위하여 종래의 경성사범학교와 경성여자사범학교를 합하여 경성사범대학으로, 대구사범학교를 대구사범대학으로 승격시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공주사범학교를 같은 목적으로 2년제 사범대학으로 승격시켰는데 이는 다음해인 1948년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1946년 2월에는 종래의 관립[지금의 국립]이었던 7개 사범학교를 각 시·도로 이관시킴으로써 교육의 지방 자치권을 강화하여 각 시·도의 교원 수급을 자율적으로 행사하도록 하였다.
강릉사범학교는 1946년 7월 20일자로 문교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고 9월 5일 자로 초대 교장 대리에 강릉공립고등여학교[현 강릉여고] 원흥균(元興均) 교장이 취임하여 초급반 1학년 2학급, 2학년 1학급, 3학년 1학급을 선발하여 1946년 9월 12일에 신입생 입학식을 거행하였다[설립인가 날짜와 신입생 입학식 날짜, 교장 대리취임 날짜는 학교 연혁지와 교육부 보관 사령부 사본에 의거하였음].
당시엔 교사(校舍) 사정이 좋지 않아 제1교사와 제2교사로 나누어 수업을 해야만 했다. 제1교사는 일제 때 일본인 아동과 특수층의 자녀가 다니던 심상고등소학교 자리[지금 명주초등학교 자리]에 있었고, 제2교사는 실천여학교 자리[지금 중앙초등학교 자리]를 사용했는데 당시엔 남녀 공학이라는 제도가 없어 제1교사(校舍)는 남학생, 제2교사는 여학생이 사용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 당시 초급반 2학년 1학급과 사범과 1학년 남, 여 각 한 학급씩을 증모하여 1946년 11월 11일 개교하였다.
[변천]
개교 후에는 1947년 2월 11일 초급반 3학년 남, 여 1학급을 증모[후일 병설중학교]하여 같은 해 6월 20일에 초급반 제1회 수료식을 거행하였다.
당시의 학제가 과도 정부 수립과 동시에 3년제 중등학교가 4년제 혹은 6년제 등으로 개편되었는데 명칭까지 초급중학교, 고급중학교로 바뀌면서 수료 혹은 졸업식도 3년제 단위로 이루어졌다. 이 같은 여러 번의 변동과 6·25 동란으로 문헌상의 기록은 거의 소실되고 현재는 연혁 정도만 남아 있다.
총무처의 정부기록보존소 사령부 사본에 의하면 1947년 9월 1일자로 원흥균 교장은 춘천사범학교로 전출되고, 같은 날짜로 춘천고등여학교[현재의 춘천여고] 유증소(柳曾昭) 교장이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동년 9월 6일에 초급 3학년 3학급, 사범과 1학년 2학급 입학식을 거행하고, 194년 6월 10일에는 초급반 제2회 수료식을 거행하였다.
1948년 9월 5일에는 초급 1학년과 사범과 1학년 2학급의 입학식을 거행하였으며, 1948년 12월 15일에 강릉여자중학교 윤일선(尹一善) 교장이 제3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49년 6월 10일에는 초급반[병설중] 제3회 수료식을 거행하고, 동년 6월 15일에는 사범과 58명에 대한 제1회 졸업장 수여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동년 9월 5일에는 초급반[중학부]과 사범과의 입학식을 거행하고, 1950년 5월 1일에는 병설중학교의 제4회 졸업식을 거행하였으며, 5월 3일에는 사범학교 제2회 48명에 대한 졸업장 수여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5일에는 사범학교 및 병설중학교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입학 20일 만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한 동족상잔의 비극은 가뜩이나 열악한 교육 환경을 더욱 악화시켰다. 더구나 이 전쟁은 남북한 간의 불신과 적대감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학교는 일시 휴교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학업은 중단되고 피난길에 올라 부산에 피난 특설학교를 설치하고 학생들은 그곳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 후 9·28수복이 있은 다음에 황폐된 교사(校舍)로 돌아와 면학을 계속하려 했으나 석 달이 채 못 되어 1·4 후퇴로 또다시 피난 생활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학교 개학은 늦어질 수밖에 없어져 1951년 8월 31일에 제3회 사범과 남녀 75명에 대한 졸업장 수여식을 하고, 동년 9월 17일에 사범학교 및 병설 중학교 제1학년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1952년 2월에 이르러 전시 중이긴 하나 ‘교육특별조치령’이 제정되어 피난 학생의 취학을 독려하며 가교실을 건축하고 피난 특설학교[부산]를 설립하여 학교 교육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2년 3월 17일 병설중학교 졸업식을 거행하고, 같은 해 3월 26일에는 사범학교 제4회 졸업생 50명에 대한 졸업장 수여식을 행하였다. 동년 4월 28일에는 병설중학교와 사범학교 제1학년의 신입생 입학식이 거행되었으며 1952년 8월 8일에는 강릉사범학교 제4대 교장으로 삼척중학교 김창복(金昌福) 교장이 취임하였다.
1953년 3월 16일에는 사범학교 제5회 졸업생 143명에 대한 졸업장 수여식이 있었고, 동년 4월 9일에는 사범학교 제1학년 입학식, 1954년 3월 15일 사범학교 제6회 135명에 대한 졸업장 수여식, 4월 7일에는 사범학교 신입생 입학식이 거행되었다. 1954년 7월 19일에는 강릉상업고등학교 윤원식(尹源植) 교장이 제5대 교장으로 취임하고, 1955년 3월 17일에는 사범학교 제7회 졸업생 193명에 대한 졸업장 수여식이 있었다.
1955년 9월 21일에는 강릉시 명주로 25[용강동 47의 8번지]에 위치한 육군 모 부대 공지에서 신축교사 기공식[현 강릉여자중학교 건물]을 했다. 1956년 3월 17일에는 제8회 졸업생 220명에 대한 졸업장 수여식이 있었고, 1957년 3월 10일에는 병설중학교 졸업식, 동년 3월 18일에는 사범학교 제9회 212명에 대한 졸업장 수여식을 하고, 그해 4월 8일에는 강릉사범학교 부속국민학교[명주로17번길 24-3[홍제동 65의 1] 현 중앙초등학교 자리]가 부설 개교되었는데 초대 교장에 윤억수(尹億守), 교감에 정지선(鄭之嫙)이 취임하였으며, 교사는 최희선, 조현묵, 오국자, 최오규, 신봉승, 김성기 등으로 이분들은 모두 사범학교 출신들이었다. 그리고 1957년 7월 9일에는 사범학교 구교사(舊校舍)[명주초등학교 자리]에서 신축교사로 이전하고 개교기념일인 11월 11일에는 신축교사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1958년 2월 27일 병설중학교 제12회 졸업식과 3월 21일에는 사범학교 제10회 190명에 대한 졸업장 수여식, 그 이듬해인 1959년 3월 20일에는 171명에 대한 졸업장 수여식을 거행하였다.
1960년 1월 9일자로 문교부로부터 현 9학급에서 6학급으로 조정 인가되었고, 동년 3월 2일 병설중학교 졸업식과 3월 22일에는 사범학교 151명에 대한 제12회 졸업장 수여식을 거행하였다.
1960년 7월 5일에 경북안동사범학교 오효근(吳孝根) 교장이 제6대 교장으로 취임하고, 1961년 3월 18일에는 사범학교 162명에 대한 제 13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동년 4월 5일에 문교부로부터 교육대학의 설립인가를 전제로 대학병설고등학교로 신입생을 모집하라는 훈령을 받고 학생 모집을 하였으나 과도기적인 학제로 신입생 1학년은 병설고등학교[후일 강릉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강원도립으로 이관] 학생으로, 2학년, 3학년은 사범학교 학생으로 편성되어 그 체제가 과도기적 학교 운영인 바 교과과정 운영상, 또는 학생 생활지도상 학교 행정에 있어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한 과정에서 1962년 2월 8일에 사범학교 제14회 159명에 대한 졸업장 수여식이 거행되었고, 같은 해 3월 5일 병설고등학교 1학년으로 모집한 3학급 180명[여자 1학급, 남자 2학급] 중 남자 두 학급은 신설 예정이었던 강릉고등학교로 편입 조치되었고, 여학생 한 학급은 강릉여자고등학교로 편입 조치되었다.
강릉사범학교는 1963년 2월 5일, 마지막 104명에 대한 졸업장 수여식이 있었다. 강릉 사범 학교는 설립 이래 졸업생 사범과[병설중학교 제외] 2,074명과 강습과 수료 36명을 합하여 2,11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리고 1963년 2월 28일자로 문교부로부터 폐교조치 되고 재직 중이던 교직원 가운데 오효근 교장과 이석룡 교감은 신설된 강릉고등학교로 전보 조치되고 여타 선생님들은 일부 춘천교육대학과 삼척공업전문대학으로 전출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선생님들은 강원도립고등학교 교감으로 승진 또는 교사로 전보 조치되었다.
[활동사항]
강릉사범학교는 15회 졸업생 배출과 동시에 문을 닫았지만 14회 졸업생 직전부터 교육 공무원의 질적 향상을 위해 사범계 학교를 고등 교육 기관인 교육대학으로 승격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꾸준히 전개되어오고 있었다. 초등교원 양성기관인 강릉사범학교도 예외가 될 수 없었으며 강릉사범학교 졸업 동문회에서도 적극적으로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사실 그 당시 동창회 운영이 다소 침체된 면이 없지 않았으나 강릉 사범 학교 부속국민학교에 근무하던 동문 교사들 간에는 동창회 운영을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의견들이 비등하였었다. 당시 강릉사범학교에 근무 중이었던 권용만 교수[강릉사범 4회]를 비롯, 여러 동문들이 숙의 끝에 우선 강릉지구만이라도 활성화의 적극성을 띠어야 함을 인식하고 회장에 조현묵(趙鉉黙)[1회], 부회장에 최윤식(崔允植)[2회], 우종숙(禹鍾淑)[1회], 총무에 최오규(崔五圭)를 선출하여 동창회 운영을 정상 궤도로 올려 놓았다.
그리고 모교인 강릉사범학교와 협의하여 교육 대학 승격 추진 위원회가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당시 강릉시 출신 국회의원 김명윤(金命潤)과 사범학교 육성회장 김각진(金珏振), 변호사 최윤택(崔潤澤), 동창회장 조현묵(趙鉉黙) 등이 한자리에 모여 영동 지방에 유일한 초등교원 양성 기관으로서의 교육 대학 설립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진정하는 건의문을 작성하고, 영동 6개 시·군의 유지와 대표를 문교부와 국회 교육분과위원회 등에 파견하여 끈질기게 추진을 시켰다. 그 결과 강릉사범학교 졸업 동문들의 열과 성을 다한 모교 되찾기 열망이 결집되어 1968년 8월 5일자로 대통령령 제3535호로 강릉교육대학이 설립인가를 받게 되었다.
[교직원 현황]
개교 당시 강릉사범학교는 명실공히 영동 지역의 유일한 국립 학교로 자리를 잡게 되어 교사의 꿈을 안은 우수한 영재들이 각지에서 다투어 몰려들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직명은 일제의 직제를 답습하여 교유(敎諭)라고 했는데, 개교 초기에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재직했던 교유(敎諭)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병록, 최이환, 서정하, 장봉수, 이정송, 김진예, 송계범, 함달호, 정호복, 정상순, 김태식, 노태범, 강치봉, 김화수, 김종경, 김용석, 이배근[교감], 김병선[교감], 홍기표, 최숙현, 이양보, 남규욱, 권혁춘, 강사 겸 교의 함태원, 서기 최돈익, 홍종찬, 조현옥, 심상렬, 이사천, 최준길[강사], 홍흥운, 김덕배, 정훈성[교사], 서덕실[교사], 서준선, 허하용, 전상춘[교사],김종대, 전오진, 최진원, 안병희, 김대언, 최형길, 이동우, 김석기, 김택기, 남궁규이, 심재경, 함영태, 오병호, 김병연, 도순철, 원충희, 이종호, 전금순, 홍윤금[이상 교육부 보관 사령부 : 1946~1949]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