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06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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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校洞遺蹟 |
영어음역 | Gyo-dong Yujeok |
영어의미역 | Archeological Site in Gyo-dong |
이칭/별칭 | 교동 청동기시대 유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교동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박영구 |
성격 | 주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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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주소 | 강원도 강릉시 교동 |
[정의]
강원도 강릉시 교동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주거유적.
[위치]
유적이 위치한 지역은 행정구역상 강원도 강릉시 교1동, 유천동의 일부를 포함한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포남동, 서쪽으로는 홍제동, 유천동, 북쪽으로는 죽헌동이 자리 잡고 있으며, 현재 강릉원주대학교 동남쪽 고속도로 변에 위치하며, 경·위도상으로는 북위 37°45′, 동경 128°53′에 위치한다.
동 지역은 강릉시의 북서편에 위치하며, 태백산맥에서 뻗어 내린 해발 50m 미만의 낮은 구릉지대로 이들 낮은 산에서 발원한 작은 물골이 경포에 다다르며 만들어 놓은 충적 평야 지대인 죽일골이 경포호에까지 접하고 있으며, 선사시대에는 경포호가 교동 지역은 물론 지변동 일대까지 접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경위]
교동 유적은 강릉시 교동 2지구 택지개발지역 문화유적 발굴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집자리 6기가 발굴 조사되었다.
[형태]
발굴 조사된 6기의 집자리는 풍화된 암반을 파 들어가 평평한 바닥을 마련하였고, 그 위에는 진흙을 얇게 깔고 다진 것이 확인되었으나 진흙 바닥을 불에 구운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바닥에서 드문드문 발견되는 소토는 화덕자리나 가옥폐기 이후의 화재 등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집자리 바닥에는 지붕과 벽체에 덮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갈대가 탄화되어 나오고 있다.
구덩의 깊이는 4벽에 따라 차이가 나는데 이것은 후대의 삭평이나 파괴에도 이유가 있겠으나 움집의 축조 당시부터 자연적 지형의 고저 차이로 말미암아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집자리들 중 남벽 쪽이 소실된 것이 있는데 이러한 집자리들은 대부분 구릉의 남쪽 사면의 풍화암반을 파고 들어간 것이다. 이들 집자리에서는 대부분 출입구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소실된 남벽 쪽이 출입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집자리의 내부 시설로는 노지, 기둥구멍, 제습용 홈, 저장공 등이 확인된다.
교동 1호 집자리의 노지는 방형의 형태로 할석을 돌린 위석식 노지이다. 위석식 노지는 신석기시대부터 확인된다. 청동기시대의 위석식 노지는 청천강 유역 세죽리유적, 평북 북창 대평리유적, 심귀리유적, 대전 신대동유적, 청주 내곡동유적, 익산 영등동유적의 경우는 할석을 이용하여 방형으로 돌을 돌린 형태이고, 춘천 신매대교유적, 강릉 방내리 11호 집자리는 냇돌을 이용하여 원형이나 타원형으로 돌을 돌린 형태이다.
교동 6호 집자리에서는 3개의 노지가 확인되었는데 집자리 중앙 부분에 북쪽으로 돌이 세워져 있고, 주변에는 원형으로 소토가 형성된 노지를 중심으로 양쪽에는 같은 간격으로 무시설식 노지가 1기씩 확인되었다.
교동 1호와 5호 집자리에서는 집자리를 마련하기 위하여 먼저 굴착한 어깨선 안쪽에 판자를 세우고 판자와 어깨선 사이에는 고운 점토로 뒷채움한 흔적이 보이며, 이러한 제습용 홈은 영동 지방 청동기시대 집자리 유적인 조양동, 방내리, 포월리 집자리 등 능선상에 위치한 많은 집자리에서 발견되고 있다.
기둥구멍은 거의 모든 집자리에서 확인되며, 기둥구멍이 확인되지 않는 집자리는 교동 4, 6호 집자리이다. 기둥구멍이 잘 남아 있는 이유는 단단한 풍화암반층의 바닥에 기둥구멍을 뚫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기둥구멍은 대부분 집자리의 외곽선인 4벽의 바로 밑에서 확인되었고, 집자리의 중앙에서는 기둥자리가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 교동 2호·5호 집자리에서는 탄화된 기둥이 2개씩 확인되었다.
저장공은 신석기시대부터 특성이 보이는데 영동 지역 청동기시대 집자리에서는 대부분 저장공이 확인된다. 저장공은 대부분 집자리의 모서리나 벽 쪽에 치우쳐서 1개 내지 3개가 발견되었다. 저장공 안이나 옆에서 토기가 출토되는 예로서 교동 1호에서는 남서벽 모서리의 저장공에서는 민무늬토기, 5호 집자리의 북동벽 모서리에 설치된 저장공에서는 각각 겹아가리토기[이중구연토기] 1점과 돌을 이용하여 뚜껑으로 덮은 호형토기 1점이 출토되었다. 교동 1호 , 3호 집자리처럼 작업대가 토기와 공반 출토되고, 교동 1호 집자리 경우 저장공 옆에서 탄화미가 출토되고 있어 저장공을 중심으로 집자리의 작업 공간 내지 조리 시설 공간으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저장공은 대부분 둥근 모양이지만 말각방형인 것과 부정형인 것 등도 보인다. 이러한 저장구덩이 중 직경 50㎝ 내외, 깊이 16~48㎝ 깊이의 소형 구덩이는 토기를 묻어 두는 저장용 구덩이로 여겨지나 교동 6호에서 보이는 직경 120㎝ 내외, 깊이 23~40㎝의 대형 구덩이의 용도는 파악하지 못하였다.
[출토유물]
교동 유적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전체 토기 조합상 서북지방의 각형토기 단계의 겹아가리토기와 순수구멍무늬토기, 동북지방의 신석기시대부터 보이는 넓은 바리 등 청동기시대 전기 민무늬토기 유적에서 볼 수 없는 토기 양상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양상을 집자리별로 보면 1호 집자리는 겹아가리 빗금[이중구연단사선]의 심발형토기, 심발형의 아가리가 밖으로 벌어진 구멍무늬토기[외반구연 공열토기], 심발형토기, 발, 곧은 입[직립구연]의 호형토기, 굽 달린 작은 항아리[대부소호] 등 기종이 다양하다. 이는 5호 집자리의 겹아가리 톱니무늬[이중구연거치문]의 심발형토기, 곧은 입의 호형토기, 발, 굽 달린 작은 항아리 바닥편의 출토 양상과 비슷하다. 나머지 집자리에서는 곧은 입의 호형토기, 발, 겹아가리톱니무늬토기[이중구연거치문토기], 겹아가리토기 등의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다.
교동 청동기시대 집자리에서 출토된 석기의 종류별 수량은 많지 않으나 민무늬토기 집자리에서 흔히 나오는 일반적 특성을 가진 석기들이 대부분 망라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석기들은 삼각형 및 삼각만입촉, 반달 돌칼, 방사선이 시문된 가락바퀴, 도끼 등 두만강 유역의 동북 지방 계통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집자리에서 나온 반달 돌칼의 각 형식별 분포는 장주형 2점과 어형 2점, 삼각형만입촉 3점, 이단경촉 1점이 출토되었다. 가락바퀴 중 토제품 중에는 단면이 평편한것(원판형), 주판알 모양(산주형), 단면 한쪽 면이 볼록한 것(만두형)이 출토되고 있는데 교동과 조양동의 유적에서는 만두형과 산주형이 압도적으로 많다. 특히 교동유적 출토품 중 방사선문이 시문된 형태의 가락바퀴는 두만강 유역의 동북지방 문화 요소와 같은 형태이다.
[의의 및 평가]
교동 청동기시대의 집자리는 방형 또는 장방형의 청동기시대 전형적인 주거 형태로 장방형의 큰 집자리에 인접하여 방형의 작은 집자리가 한 세트로 조사되어 청동기시대 사회문화 및 촌락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각 집자리에서 출토된 토기의 양상을 살펴보면 순수 겹아가리토기와 겹아가리에 빗금무늬 또는 삼각톱니무늬가 시문된 심발형토기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이들 토기 유형은 동북지방의 신석기시대 말기나 청동기시대의 아주 이른 시기에 나타나는 양상으로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말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오는 과도기적 시기의 문화 양상과 전파 경로를 밝혀 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판단된다.
한편 5호 집자리의 동북 모서리에서 노출된 판자벽과 기둥, 저장공과 토기 노출 상태가 매우 양호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사회문화와 건축사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5호 집자리는 전사하여 강릉원주대학교 박물관에 이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