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T01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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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渭村里-自然-世居姓氏-人物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위촌리 |
집필자 | 김기설 |
[세거성씨]
위촌리에는 유서 깊은 몇몇 집안이 대대로 살아오고 있는데, 이들 세거성씨를 알아본다.
먼저 강릉 김씨[위촌파]를 들 수 있는데, 강릉 김씨 위촌파는 매월당 김시습의 양자로 입적된 김덕양의 아들 김준현이 파조가 된다. 김덕양은 김시습의 고조인 김한신의 아우 김한경의 5세손이다. 현재 마을에는 김준현의 15세 종손인 김덕래[73살] 씨가 살고 있다.
강릉 최씨 비인공파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 년 전에 마을로 들어왔는데 ‘종(鐘)’자 항열의 9대조인 ‘최장이’라는 분이 파조가 된다.
강릉 함씨 위촌파는 지금으로부터 450여 년 전에 ‘식(植)’자 항열의 15대조인 함숭조가 파조가 된다. 강릉함씨는 낭천파, 오곡파, 위촌파, 오봉파가 있다.
성주 이씨는 ‘석(錫)’자 항열의 15대조인 진사공 이종제의 아들 이시준이 파조가 되는데 그는 지금으로부터 약 450여년 전에 조산(대전동)에 들어왔고 그 후손들이 위촌리에 들어왔다.
한산 이씨가 위촌리에 세거하게 된 경위는 325년전으로 거슬러 간다. 조선시대 무과에 급제하고 주부(主簿)를 지낸 이은(李垠)[1641-1689]의 장남 이정한(李䅍漢)[1660-1690]은 1690년 2월 부인 강릉김씨가 사망하자 어린 두 아들 이서(李稰)와 이빈(李穦)을 위촌리에 사는 장인 김명규(金命奎)에게 맡겼는데, 같은 해 4월 이정한마저 사망하면서 어린 형제가 강릉 외가에서 계속 자라게 되었다. 강릉시 남문동에 거주하는 후손 이종구에 따르면 325년이 지난 2015년 현재 이들의 후손은 100세대 이상으로 늘어났고, 강릉 일원에 80세대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인물]
위촌리가 배출한 역사적 인물 가운데서 대표적인 인물 몇 분만 거론해보기로 한다.
먼저 김상적은 만력 정축 8월에 태어나서 숭정 경진 정월 64세로 세상을 떠난 인물로 호는 위촌이다. 대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공조좌랑을 거쳐 인조 때 경상북도 풍기군수를 역임했다. 문집 3권을 남겼다.
김세록은 만력 신축 4월에 태어나서 숙묘 기사 3월 89세로 세상을 떠난 인물로 호는 위천(渭川)이다. 김상적의 아들로 위촌리의 대동계를 주도적으로 결성하였다. 『전고대방(典故大方)』에 보면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는데 특히 대나무를 잘 그려 바람이 불면 대나무에서 소리가 났다고 한다.
심스테파노는 강릉의 골아우에 살았는데 고종 3년(1868) 무진년 5월에 병인교난 때 포도청 포졸에 잡혀 횡성군 풍수원에 사는 최바오로와 함께 갇혔다가 치명했는데, 나이는 29세였다. 무덤이 어디 있는 줄은 모른다.(『치명일기』)
한산 이씨(韓山李氏) 이승학(李承學)[1838-1923]은 이빈(李穦)의 고손(高孫)으로서 1894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올랐다. 수차 입궐 권유를 받았으나 애향심의 발로로 후학 훈도에 전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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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학 의금부도사 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