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T06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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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荷坪-人物-文化遺蹟-文化遺蹟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
집필자 | 임호민 |
[문화유적]
하평마을에 남아 있는 문화유적은, 역사적인 인물들의 일화가 남아 있는 것이 많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과 조금 다른 면이 있다.
운양초교 아래에서 옛 철길까지의 넓은 들을 향교평(鄕校坪)[생계들]이라고 한다. 옛날 이 논이 강릉향교의 소유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이 논 부근에 12가구가 살았으나 병자년 포락 이후 모두 이사하여 지금은 그 터가 다 논이 되었다.
애일당(愛日堂)터는 조선 중종 때 문신인 김광철의 옛집 터로 그의 호가 애일당이다. 그는 조선의 문장가 초당 허엽의 장인이고, 허봉, 허균, 허난설헌의 외조부다. 애일당이 있는 뒷산 형국이 도룡이 누워있는 형국이어서 교산(蛟山)이라 하는데, 교산은 애일당의 외손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호다.
쌍한정(雙閒亭)은 사화촌 즉, 사천 해안 후리포에 있다. 삼가 박수량과 사휴 박공달은 은덕이 있는 선비들로 날마다 같이 이곳에서 술과 시문을 즐기며 산해경관을 벗삼아 보냈다고 하여 쌍한정이라 이름지었다. 박공달이 박수량의 제문을 지었는데 그 글 중에 ‘세 간 초가집이 시냇가를 따라 남북으로 늘어서 있다. … 쌍한정의 달빛은 가이없이 밝게 비춘다.(三間白玉, 一溪南北 …雙閑亭月, 萬古長明(삼간백옥, 일계남북 …쌍한정월, 만고장명)’라는 내용이 있다. 상공(相公) 박민헌이 관동 지역 관리로 왔다가 선인의 호연한 정취에 취해서 고적을 찾아 그 형승을 그려가지고 갔다고 전한다.
비슷한 시기인 조선조 중종 때 참판을 지낸 김광진이 주위에 참나무 느티나무를 심어 바람을 막고 그 속에 진목정(眞木亭)이란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현대에 들어서 하평마을의 대표적인 위인인 교산 허균을 기리는 시비가 건립되었다. 1983년 8월 전국 시가비건립동호인회 주관 하에 양천 허씨 문중의 도움을 받아 그가 소년시절을 보낸 사천면 사천진 2리 교산 언덕에 교산 허균의 시비를 세웠다.
비문 앞면에는 후학 김동욱이 번역하고 쓴 허균의 시구가 적혀 있다.
빈 항아리 차를 기우르고 한 자루 향 피우고
외딴집에 누워
건곤고금(乾坤古今)을 가늠하노니
사람들은 누실이라 하여 살지 못하려니 하건만
나에게는
신선의 세계인져
(누실명 陋室銘)
논밭은 거의 거칠어졌고 백성은 반나마 죽어 버렸네
세금은 자주 거둬들여야 하는데
가뭄이 들은 데다 황충이까지 들끓어라
정치에서야 어찌 뛰어난 솜씨를 뽐내랴
마음은 도리어 고향만 생각하네
이천석 녹봉이 공연히 부끄러우니
옛날의 어진 수령을 따르진 못할레라
(1604년 그 당시 사회상을 그린 시)
비문 뒷면에는 문학박사 소재영이 짓고 정양완이 쓴 글이 적혀 있다.
‘오대산에서 뻗어 나온 이 나직한 산줄기가 교산이니 허균은 이를 아호로 삼았도다. 이곳은 외가 강릉김씨 애일당의 터로 동해 해 뜨는 찬란한 관경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으리로다.
교산은 1569년 여기서 태어나 젊은 시절 꿈을 키우며 공부하시고 임란 뒤 잠시 어머니를 모시고 여기에 사셨도다
교산은 일문 5부자 "초당 엽", "악록 성", "하곡 봉", "난설헌 초희"가 다 문장으로 이름이 나되 교산은 귀재로 떨쳤도다. 그 뒤 교산은 벼슬을 하였으나 광해군 10년 1618년 역모를 꾸몄다 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다.
이 밖에도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학산초담(鶴山樵談)』, 『한정록(閑情錄)』 등은 다 주옥같은 시와 문장이니 사람은 가도 문장은 남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