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T07017 |
---|---|
한자 | 鶴-文化遺蹟-掘山寺遺蹟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
집필자 | 김흥술 |
[굴산사유적]
학마을은 신라말 불교의 9산 중 하나인 사굴산파를 열었던 범일국사의 탄생지이며, 동시에 범일이 창건한 사굴산파의 종찰이었던 굴산사터가 있는 곳이다. 또한 왕고개, 장안성 등 고려멸망의 전설·설화가 전해오고, 조선시대 석천서원의 옛터에 행단(杏壇)으로 있었던 수령 5백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고, 글 읽는 전통이 이어져 근대 민족교육의 산실 학산서당과 학산보흥강습소가 있었던 역사전통의 마을이다.
굴산사터 부도(浮屠) (보물 제85호,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731, 높이 3.77m, 재료- 화강석, 시대- 고려시대, 지정연월일- 1963. 1. 21)는 굴산사지의 유적으로 굴산사의 창건주 범일국사의 사리를 봉안했던 탑이라고 전한다. 그렇지만 범일이 입적한 때가 진성왕(眞聖王) 2년인 890년인데 비해 이 탑은 구주나 조각 수법으로 미루어 고려 때의 작품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범일국사 사리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탑은 일석(一石)으로 된 지대석 위에 높직한 2단의 몰딩을 조각하고 중앙에 별석으로 된 소로형(小爐形)의 괴임을 두어 하대석을 받들고 있다. 하대석 밑은 8각형이고 위는 원형으로 다듬어 권운문(拳雲紋)이 위로 펴져 올라가며 받쳤고 상면 중앙에는 소구(小溝) 같은 홈을 파서 중대석 괴임을 조출(彫出)하였다.
중대석은 권운문을 3단으로 받쳐 8개의 우주(隅柱)처럼 세우고 그 사이에 낙천(樂天)과 공양상(供養像)이 전면에 입체적으로 양각되어 있다. 상대석은 8판연화(瓣蓮花)로 앙연(仰蓮)을 조각하였고 판 내에도 큼직한 화문(花紋)을 양각하고 있다.
탑신은 8각으로 작은 편이고 표면에 조각 장식이 없다. 옥개(屋蓋) 또한 8각으로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우동(隅棟)이 뚜렷한데 조각 장식은 없다. 옥상에는 단판연화(單瓣蓮花)를 이중으로 돌려 받친 보주(寶珠)가 얹혀 있다. 최근 새로이 조사를 실시하고 복원 정비하였다.
굴산사지 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제86호,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181, 높이 5.4m, 재료- 화강석, 시대- 통일신라시대, 지정연월일- 1963. 1. 21)는 신라 문성왕(文聖王) 때 강릉 학산 출신 범일(梵日)국사가 창건한 굴산사의 유적이다. 이 당간지주는 일석(一石)식의 거대한 석재지주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당간지주의 하나이다. 사면은 아무런 조식(彫飾)이 없는 평면이며 아랫부분은 돌을 다듬을 때 생긴 잡다한 정(釘)자욱이 마멸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내면과 외측면은 수직을 이루었고 전후양면은 거의 상부까지 수직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지주상단에 올라가서는 양측을 둥글게 깎아 곡선을 만들고 정상은 뾰족하게 하였다.
상단 가까운 곳과 지상에서 지주높이 1/3쯤 되는 곳에 두 기둥이 서로 통하게 둥근 구멍을 뚫었는데 당간(幢竿)을 고정시키는 간목(竿木)을 끼우던 구멍이다. 이 지주는 거대할 뿐 아니라 거기에 걸맞은 강인한 수법은 통일 신라의 작품다운 웅대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굴산사지(崛山寺址)(사적 제448호,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732, 지정연월일- 1971. 12. 16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3.6.2 사적으로 재지정)는 말 그대로 굴산사의 터를 뜻한다. 굴산사는 신라 말기의 고승 범일(梵日)[초명은 품일]이 문성왕(文聖王)[850년경] 때 창건한 사찰로 신라 불교의 종파인 5교9산(五敎九山)의 하나이다. 지금 남은 유적으로는 당간지주와 부도탑 두 국가지정 보물 외에도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류와 초석(礎石) 그리고 전설로 전하는 석정(石井) 등이 산재하고 있다. 사찰 규모는 약 15만 평으로 추정할 수 있는 넓은 유지다. 굴산사는 고려시대에도 수천의 승려가 기거하는 웅장한 사찰이었으나 고려말 우왕(禑王)의 학산 피신 사실과 전해오는 전설로 미루어 볼 때, 고려의 멸망과 함께 굴산사도 조선 초기에 훼철된 것 같다.
굴산사지로 추정되는 일대는 현재 농경지로 변하여 확실한 규모와 배치는 알 수 없으며 1936년의 대홍수로 농경지 일부가 유실되어 초석일부가 노출되면서 건물의 일부가 확인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굴산사지 부도(보물 85호), 굴산사지 당간지주(보물 86호), 굴산사지 석불좌상(문화재자료 38호) 등이 남아 있다. 굴산사지에는 모두 4구의 석조불상이 유존하고 있다. 그 중 1구는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보호각 내에 안치되어 있고, 2구는 1968년 후에 세워진 굴산 암자에 있던 것을 법당 내 봉안하였다. 나머지 1구는 석천 내에 있던 것을 2003년 굴산사 암자 내에 옮겼다. 굴산 암자에 봉안된 불상 중 1구는 현 암자 부근에 있었으며, 함께 봉안된 1구는 원래 석천 부근에 있었던 것을 봉안한 것이다. 처음 봉안된 것은 원래 그곳에 있었던 것이며, 석천에 있다가 옮겨 온 것은 산신지 부근에 있던 것을 이전했던 것이라 한다.
이들 4구의 석불은 모두 석조 비로사나불좌상의 형식을 띠고 있는데 굴산 암자에 봉안된 2구의 석불은 좌고가 각각 110㎝, 83㎝이며 모두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 손 모습은 지권인을 취하여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우수가 좌수의 상위에 있는 정형을 취하고 있으나 나머지 하나는 반대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현재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는 초암 내에 있는 석불은 화강암으로 된 좌상으로 통견의에 머리는 나발이며 손모습은 지권인이다. 상호는 완만하며 어깨가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머리에 커다란 관이 얹혀 있다. 최근 시멘트로 메워 단을 만들었으므로 하부는 보이지 않는다. 전체높이 160㎝, 둘레 250㎝, 머리둘레 51㎝, 어깨넓이 124㎝, 가슴둘레 70㎝다. 나머지 1구인 석천 내의 탑재 위에 올려 있는 석불은 머리 부분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고 지권인은 통식을 벗어난 좌수가 우수위에 오는 변형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