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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918
한자 李炳九
영어음역 Yi Byeonggu
이칭/별칭 치홍(致洪),초운(樵云)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송호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862년 8월 1일연표보기
활동 1895년 3월연표보기
활동 1904년연표보기
활동 1907년연표보기
몰년 1916년 7월 30일연표보기
추모 1990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금릉군 조마면 대방리
성격 의병|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청국청원신사단 결성|충의사 조직

[정의]

개항기 김천 출신의 의병·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병구(李炳九)는 1862년 8월 1일 경상북도 금릉군 조마면 대방리[현 경상북도 김천리 조마면 대방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하빈(河濱), 자는 치홍(致洪), 호는 초운(樵云)이다. 이병구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이듬해 3월 허위(許蔿)·강일선(姜馹善) 등과 함께 김산(金山)에서 거의했으나 관군에게 패하였다. 의병을 일으키는 데 실패한 이병구는 여덟 명의 동지들과 함께 청나라의 이홍장을 만나 청군의 도움을 받아 일본을 몰아내자는 생각으로 청국청원신사단(淸國請願紳士團)이란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조선에서 청일 양국이 세력 다툼을 벌이다가 청일전쟁으로 발전한데다 청나라가 패했으므로 일본에 대한 원한이 깊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이홍장은 늘 한국을 도왔으므로 민간 외교 차원에서 강력히 요청하면 기꺼이 들어 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병구는 청국청원신사단의 일원으로 걸어서 의주까지 가서 압록강을 건너려 했으나 의주관찰사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고, 이후 6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었다.

1904년 이병구는 을미의병에 참가했던 허위·우용택·여중룡 등이 만든 충의사에 가담하였다. 충의사는 황실(皇室)의 강녕(康寧), 민명(民命)의 보호, 군제의 초연(抄鍊), 인재의 교육 등 현재의 급무에 힘을 써 자강지책을 강구하는 데 목적을 둔 단체였다. 이병구는 영남의 유림들과 함께 고종에게 매국 오적을 처단하고 을사보호조약 무효 선언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국권 자립 강화와 배일 강경책을 건의하였다. 또한 일본 공사와 일본군 사령관에게 침략의 죄목을 열거한 항의서를 보냈다. 나아가 각국 외국 공사에게 일본의 침략 실태를 폭로하고 조선이 독립할 수 있도록 후원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황성신문』에 일본에 저항하자는 논설을 게재하여 항일 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1907년 여중룡·우용택 등과 일본공사관 폭파를 계획한 일이 발각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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