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1183 |
---|---|
한자 | 賀老書院 |
영어음역 | Haro Seowon |
영어의미역 | Haro Private Confucian Academy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 830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삼조 |
건립 | 1984년 |
---|---|
현 소재지 |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 830 |
성격 | 서원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벽진 이씨 평정공 종회 |
관리자 | 벽진 이씨 평정공 종회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에 있는 조선 시대 관료 이약동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
[개설]
평정공 이약동(李約東)은 1451년(문종 1)에 증광 문과에 급제하고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을 거쳐 1454년(단종 2) 감찰(監察)·황간현감, 1458년 지평(持平)을 거쳐 선전관(宣傳官), 종부시정(宗簿寺正), 귀성부사, 제주목사 등을 지내고 1474년(성종 5)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477년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경주부윤, 호조참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전라도관찰사, 한성부좌윤, 이조참판, 개성유수 등을 역임하고 1491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변천]
감천 원동에 노촌 이약동을 배향하는 청백서원이 건립되었다. 그 뒤 1648년 김산 자산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경렴서원(景濂書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노촌선생실기』를 보면 경렴서원의 명칭 유래가 기재되어 있다. 즉 송나라 주돈이(朱敦頤)가 침체된 공맹의 도덕을 다시 발명하여 정주에게 전하였으며, 송나라 사람이 주돈이를 존앙하듯이 선생 서원을 그와 같이 존모하여 ‘경렴(景濂)’이라 불렀다고 한다.
경렴서원에서는 배향자를 확대하여, 향유(鄕儒)로는 김종직·조위(曺偉)·최선문(崔善門)·이약동·김시창(金始昌) 등을, 송유(宋儒)로는 주돈이·주희암(朱熹庵)·문문산(文文山)을 배향하였다고 한다. 향유(鄕儒) 5명 중 최선문[화순 최씨]과 김시창[해풍 김씨]은 김천 출신이다. 1868년 서원 철폐령에 따라 경렴서원이 훼철되었다.
1984년에 훼철된 경렴서원을 복원하기 위해 타 문중들과 숙의를 하였으나 뜻이 맞지 않아 벽진 이씨가 중심이 되어 서원을 복원하였다. 복원 당시 마을 이름을 따서 하로서원으로 정하였으며, 현재 이약동만을 배향하고 있다. 현재 벽진 이씨 평정공파 종회가 서원을 유지하고 있다. 양촌동은 전통적으로 벽진 이씨의 집성촌이었다. 이에 하로서원을 이곳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하로서원은 김천시 양천동 마을 어귀에서 1㎞ 정도 마을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
서원은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이 일자(一字)로 배치된 형태이다. 강학 공간은 강당, 동재, 서재 3채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은 노수당, 동재는 염수당, 서재는 필유당이라고 이름 지었다. 현판 이름은 문중에서 합의해 결정했다고 한다. 노수당에는 ‘노촌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노촌당은 1977년에 중수하였다.
그것을 기념하는 노촌당 보수비가 노수당 오른쪽에 서 있다. 노수당은 1981년에 중수하였다. 그것을 기념하는 노수당 보수비가 노촌당 보수비 옆에 서 있다. 제향 공간은 사당, 외문, 내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청백사, 내문은 숙경문, 외문은 영은[사]문이라 이름 지었다. 강학 공간에서 사당으로 연결되는 문의 이름은 여재문이다.
[현황]
현재 매년 봄, 가을로 제향하고 있다. 봄에는 음력 3월 상정일에 유림 향사하고 있고, 가을에는 시사를 대신하여 서원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매번 향사에는 약 40~50명의 문중 사람들, 김천시의회의장, 김천교육장 등 김천의 대표 인사들이 참석하고 있다.
현재 벽진 이씨 평정공파 종회에서는 이약동을 기리기 위해 그의 문집 『노촌선생실기』를 인쇄·출판하였다. 서원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전답은 서원이 훼철되는 과정에서 사라져, 현재 하로서원에 소속된 전답은 없다. 양촌동 마을 어귀[풍수적으로 청룡 끝자락에 위치]에는 이약동 신도비, 산천단 유적비, 벽진 이씨 서거지허비, 이약동 아버지의 유허비가 서 있다.
이약동 신도비는 이약동 묘소 앞에 있었으나 관리가 어려워 마을 어귀로 옮겨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산천당 유적비는 2009년 제주도민 정두정·홍순녕·김진수 등에 의해 이약동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그 건너편에는 사모바위가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