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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봉이가 거닐던 탁류길을 걷다.-채만식의 『탁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032
한자 -濁流-蔡萬植-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황태묵

[개설]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소재지는 채만식(蔡萬植)[1902~1950]이 나고 자란 고향이고, 채만식 문학의 중요한 공간적 배경이며, 채만식 문학을 가능하게 한 요람과도 같은 곳이다. 채만식이 쓴 소설에는 군산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적지 않게 나오는데, 장편 『탁류』에는 1930년대 중반 군산의 도시 구조가 충실하게 재현되어 있다. 악랄한 일제 착취 현장인 미두장 일대가 군산의 중심부라면 여주인공 초봉이가 살고 있는 둔뱀이 일대는 군산의 주변부라는 점에서 두 지역은 확연하게 대립한다. 소설에서 초봉이가 거닐던 탁류 길은 나라를 빼앗긴 가난한 조선인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한 길이라는 점에서 수탈과 억압의 역사성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다. 군산은 당시의 도시 구조와 풍모를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기에 소설에서 초봉이가 거닐던 길을 따라가면 작가 채만식이 생각하고 있는 군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탁류와 채만식]

1. 탁류 개관

『탁류』는 원고지 2,300매 분량의 장편 소설로, 1937년 10월 12일부터 1938년 5월 15일까지 『조선 일보』에 196회 연재되었고, 1939년 『박문 서관』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탁류』의 짜임을 보면 2년간에 걸친 한 여인의 비극적 운명의 전말을 주 플롯으로 삼고 있으며, 그 내용은 인간 기념물에서 시작하여 서곡(序曲)으로 끝맺는 열아홉 개의 소제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품의 줄거리를 들어 이해를 돕기로 한다.

‘정 주사는 신구 학문을 고루 익히고 군청에서 일하던 인물이나 당시 유행하던 미두(米豆)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다. 그에게는 초봉과 계봉이라는 두 딸이 있었는데, 초봉은 예쁜 용모로 뭇 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처녀이다. 초봉은 기울어지는 가세 때문에 약국에 취직을 하지만, 약국 주인 박제호와 은행원 고태수에게 추근거림을 당한다. 초봉의 마음은 비교적 건실한 청년인 승재에게 향하지만 둘 사이에는 많은 장애물이 가로놓인다. 태수 역시 미두 때문에 재산을 거의 탕진하는데, 곱사등이 형보를 통해 초봉과의 혼인을 추진한다. 형보는 간악한 인물로 태수를 간계에 빠트린 다음 초봉을 차지할 꾀를 꾸민다. 결국 형보의 흉계로 태수는 간통 현장에서 정부와 함께 맞아 죽고, 초봉은 남편을 잃고 형보에게 겁탈을 당하는 신세가 된다. 태수의 장례를 치른 초봉은 서울에 있는 제호를 찾아 길을 나섰다 그만 제호의 여자가 되고 만다. 서울에서 봉은 제호의 첩으로 지내다 누구의 딸인지도 모르는 송희를 낳는다. 그러던 어느 날, 형보가 초봉의 집에 찾아와 자신이 송희의 친아버지라고 주장하자 제호는 일이 복잡해질 것을 염려하여 양보하고 물러선다. 초봉은 남자들이 역겨웠으나 악독한 형보를 잘 아는 지라 친정에 돈을 주고 동생들도 교육을 시켜 주겠다는 다짐을 받고 마음에도 없는 형보의 여자가 된다. 얼마 후 계봉은 서울로 올라와 초봉과 함께 살면서 형보의 돈으로는 공부하기가 싫어 백화점에 취직하여 일하게 된다. 한편 의사 시험에 합격하여 서울로 올라오게 된 승재는 계봉으로부터 초봉의 가엾은 사정을 들은 후 계봉과 함께 초봉을 형보의 손아귀에서 빼내려는 계책을 세운다. 하지만 초봉은 형보가 어린 어린 딸을 위협하는 것에 격분하여 형보를 죽이고 만다. 뒤늦게 초봉을 찾아 온 승재와 계봉은 초봉에게 자수를 권하고, 초봉은 두 사람의 설득으로 결국 경찰에 자수한다.’

2. 채만식의 소설 세계

채만식(蔡萬植)의 본관은 평강(平康)이며, 호는 백릉(白菱)·채옹(采翁)이다. 1902년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 동상 마을에서 부친 채규섭(蔡奎燮)과 모친 조우섭(趙又燮) 사이의 9남매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1924년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 문단』 12월호에 단편 「세 길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으나 작가로서의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1930년대에 접어들어 시작되었다. 이후 식민지 상황 아래에서 농민의 궁핍, 지식인의 고뇌, 도시 하층민의 몰락, 광복 후의 혼란상 등을 실감나게 그리면서 그 근저에 놓여 있는 역사적·사회적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이주형 교수는 「채만식의 생애와 작품 세계」에서 채만식의 작품 세계를 다섯 시기로 세분한 바 있는데, 이를 참고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920년대 : 습작기로 볼 수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미발표된 첫 작품 「과도기」[1923]인데, 1920년대 초 소설의 일반적 경향처럼 절제되지 않은 감정의 표출과 독백체 문장으로 이루어졌다. 조혼 같은 폐습, 반민족 행위자, 일본인 등에 대한 젊은 지식인의 증오가 직선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2) 1930-1933년 : 작품 활동이 본격화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이때는 농촌의 현실[「농민의 회계보고」와 「부촌」], 지식인의 궁핍상[「두부」], 노동자의 갈등[「감독의 안해」], 유이민 현상[「간도행」] 등을 다룬 단편과 희곡을 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아직 작가적 성숙성이 약하다고 하겠는데, 이것은 당시 발표된 작품들의 길이가 짧다는 특징에서 우선 잘 드러난다. 장편 『인형의 집을 나와서』에서는 가정적 관습, 여성 해방 문제, 계급 문제, 노동 문제 등을 다루기도 하였다.

(3) 1934-1938년 : 창작 활동이 가장 활발하고 질적으로도 주목되는 전성기로, 현실 인식의 성숙도와 예술적 성취도가 최고 수준에 이른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발표된 「레디메이드 인생」, 「명일」, 『탁류』, 『태평천하』, 「치숙」, 「소망」 등의 소설과 「제향날」과 같은 희곡은 그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궁핍한 사회 현실 속에서 소외된 지식인의 무능한 삶을 풍자적·반어적 수법으로 형상화하고 있어 새로운 풍자 문학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태평천하』의 판소리식 풍자기법이나 「치숙」과 「소망」의 이중 반어적 우회 표현기법 등은 채만식작품의 예술적 성취도를 돋보이게 하는 요소로 꼽히고 있다.

(4) 1939-1945년 : 일제 강점기의 말기 현상과 함께 주체의 갈등과 흔들림이 크던 시기이다. 현실에 대한 직접 부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그는 「패배자의 무덤」처럼 현실을 부정하고 자살하는 지식인이나 「냉동어」처럼 의식의 식물 인간 상태가 되어 방황하는 지식인을 그리거나 「종로의 주민」처럼 현실적 지표와 행동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무위 도식하는 지식인 등 현실의 낙오자가 된 지식인들을 통해서 현실을 전면적으로 냉소, 부정하거나 회의하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러다가 이른바 독서회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회유와 억압에 흔들리면서 『여인 전기』와 같은 소위 총후 봉공, 내선 일체의 친체제적인 작품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5) 1945-1950년 : 일제 강점기 말기 자신의 친일 행위를 자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진보적 중간파의 입장에서 해방 직후 과도기의 혼란상을 여실하게 그려내고자 했다. 「민족의 죄인」, 「역로」를 통해서 일제 말기 지식인의 친일 행위를 자기 비판하였고, 「미스터 방」, 「맹순사」, 「논 이야기」, 「도야지」, 「낙조」 등을 통해서 새로운 조국의 건설 과정에서 친일파가 다시 득세하는 민족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풍자하였다.

1970년대에는 중편 소설 「소년은 자란다」, 「과도기」 희곡 「가죽 버선」 등을 비롯한 많은 유작들이 발굴, 공개되었고, 1989년에는 창작과 비평사에서 『채만식전집』[총 10권]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저술로는 단편집 『레디메이드 인생』, 『잘난 사람들』, 『낙조』, 소설집 『탁류』, 『태평 천하』 등과 희곡집 『당랑의 전설』 등이 있다.

[탁류 등장 인물로 보는 근대 인물상]

『탁류』에서 초봉은 신학문을 배우고 미모까지 겸비한 고운 심성의 소유자지만 자기 나름의 주관이나 의지는 결여된 인물이다. 극히 수동적이고 봉건적인 나머지 남승재를 사랑하면서도 아버지 정주사의 강권에 못 이겨 고태수와 결혼한다. 그리고 고태수·장형보·박제호에 의해 차례로 농락당하다 급기야 자신의 딸을 학대하는 형보를 죽이는 살인자로 전락한다. 초봉을 타락의 길로 인도하고 재촉하는 네 남자, 정주사·태수·제호·형보 등은 소설에서 부정적으로 설정되는데, 이는 당대인의 무능과 타락에 대한 채만식의 혐오감 내지 실망을 반영한다. 즉 이기적 욕망으로 딸을 희생시키는 무능한 정주사, 방탕한 놀음에 사기·횡령을 일삼는 고태수, 제약 회사의 소득을 모두 향락에 탕진하는 박제호, 유산자에 기생하면서 악행을 일삼는 장형보 등은 근대 사회로의 진입 과정에서 물질 중심주의와 인간성 상실이라는 당대 사회의 총체적 모순을 대변하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부정적 인물들이 초봉의 운명을 농락하는 세계가 곧 작가가 말하는 탁류이다. 자본주의적 근대화가 진행되었지만 아직 봉건적인 구습이 남아있고 왜곡된 자본주의화의 물결 아래 탐욕으로 점철된 사회가 작가가 파악한 1930년대 한국 사회의 실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한 자본주의적 인물에 의해 희생되고 파멸되는 초봉의 비극적 삶은 식민지와 자본주의의 이중적 상황에 빠진 1930년대 한국 사회의 혼란과 타락상을 상징한다 하겠다. 그런가 하면 작가는 절망감을 딛고 일어서서 당대 사회의 속악성과 대결할 것을 기약하는 계봉, 남승재 등의 새로운 인간상도 보여 준다. 마지막 장의 부제가 ‘서곡(序曲)’인 것은 탁류가 몰고 온 찌꺼기들을 씻어내고 맑은 물이 흐르는 시대가 오리라는 희망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탁류의 배경]

과거 옥구현에 속한 작은 포구에 불과했던 군산이 근대적인 항구 도시로 급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쌀이 있었다. 옥구와 만경 평야에서 거두어들인 쌀을 반출해가기 위해 일본은 이곳에 철길과 신작로, 그리고 항만을 건설했다. 이른바 전군 가도군산 내항의 폐선 구역이 그 생생한 증거에 해당한다. 군산의 발전은 곧 수탈과 착취의 심화를 의미했고, 그 수탈과 착취의 중심적 공간은 소설 『탁류』의 배경과 일치한다. 『탁류』에 형상화되어 있는 군산의 도시 풍경은 1930년대 군산의 도시 구조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소설의 무대이자 당시 군산의 심장이었던 미두장 거리는 지금의 시외 버스 터미널에서 외항에 이르기까지의 긴 도로인 해망로의 중간쯤에 위치한 개항 100주년 기념 광장에서 찾을 수 있다. 1980년대 해망로 확장 공사로 미두장(米豆場)[미곡 취인소]건물은 헐렸으나 그 반대편에 고태수가 근무하던 은행으로 보이는 조선 은행 군산 지점 건물이 엄연히 남아 있다.[소설에는 푸른집웅을 이고섯는 ○○은행으로 표기되었음] 한때 군산 원도심의 흉물로 전락했던 조선은행 건물은 지난 2008년부터 복원 작업을 실시해 현재 전시 공간으로 개관하여 운영되고 있다.

곱추 장형보가 마루강[丸江]이라는 미두점의 바다지[場立][시장 대리인]으로 있던 중매점(仲買店)은 고태수가 근무하던 조선 은행과 작품 속에서 큰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1930년대 군산부 시가 지도에 따르면, 이 미두장 거리에는 본호 상점(本好商店)[현재 코리아나 볼링 센터], 송장 상점-중본 상점(松場商店-中本商店)[현재 군산 지역 자활 센터], 고림 상점(高林商店)[현재 군산 상패사], 구십 구육 남상점(九十九六男商店)[현재 빈해원], 갑중 상점(甲中商店)[현재 현대 이용원], 산본 상점(山本商店)[현재 군산 의원 옆 티제이 미디어], 전전 상점(前田商店)[현재 백년 광장 우측 건물] 등 수많은 중매점들이 즐비하게 존재했다. 이곳은 일본인들의 거주지이자 상업지역에 해당하는데, 지금도 그 흔적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미두장 앞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가 본정통(本町通)[현재 해망로]이고, 미두장 뒤를 동서로 통과하는 도로가 전주통(全州通)[현재 구영 1길과 장미 1길을 연결하는 도로], 미두장 옆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가 목통정(目通町)[현재 대학로]이며, 전주통 뒤로 대화정(大和頂)[현재 구영 2길과 동령길을 연결하는 도로], 욱정(旭頂)[현재 구영 1길과 구영 5길을 연결하는 도로], 명치정(明治頂)~소화정(昭和頂)[현재 중앙로], 횡전정(橫田頂)[현재 구영 2길에서 중정길을 연결하는 도로] 등의 도로들이 바둑판처럼 형성되었다.

미두장 근처에는 많은 미창(米倉)과 조선 은행, 식산 은행, 상업 은행 등 5개의 은행이 몰려 있었는데, 군산 조선 은행 부근을 해방 이후 신창동금동, 영화동장미동(藏米東)이라 불렀다. 지금 이 일대에는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쌀 창고가 지금까지 여러 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예전의 군산항역과 내항 일대 여객 터미널 주변의 출입국 관리 사무소, 해운 항만청, 세관, 대한 통운 물류 건물 그리고 선창의 벽돌 창고 등이 그때의 미창 건물들이거나 그 자리에 신축, 개축된 건물들이다. 일제가 쌀을 실어 나르기 위해 건설한 뜬 다리 부두에서 금강 쪽으로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는 포구가 바로 정주사가 눈물을 흘리며 통탄하던 째보 선창[지금의 금암동]이다. 조선 은행, 미두장 터와 함께 이 째보 선창 자리 앞에 채만식의 문학을 기념하는 조촐한 초석이 놓여 있다.

미두장 일대가 군산의 중심부라면 여주인공 초봉이가 살고 있는 둔뱀이 일대는 군산의 주변부라는 점에서 두 지역은 확연하게 대립한다. 현재 군산 시내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대학로를 기준으로 볼 때, 서편 바닷가 쪽에 해당하는 월명산 아래 월명동, 영화동, 신흥동 일대가 일본인 거주지였고, 대학로 건너편의 개복동, 둔뱀이[현재 둔율동과 창선동과 선양동 일대], 스래[京浦里][현재 경장동흥남동 일대]를 중심으로 한 구릉 지역이 조선인 거주지였다. 소설에서 일본인들의 거주지는 ‘정리된 시구(市區)라든지, 근대식 건물로든지, 사회시설이나 위생시설로든지, 제법 문화의 도시’로 묘사되고 있는데 반해, 조선인은 군산의 주변부에서 ‘급하게 경사진 언덕비탈에 게딱지 같은 초가집이며 낡은 생철집 오막살이들이, 손바닥만한 빈틈도 남기지 않고 콩나물’처럼 살고 있으며 ‘인제 한 세기가 지난 뒤라도 이 사람들이 제법 고만큼이나 문화다운 살림을 하게 되리라 싶질 않’은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일명 콩나물 고개[현재 개복동에서 선양동으로 가는 곳에 위치한 창성동 고개]라 불리는 둔뱀이 구릉 지역은 이후에 산을 동강내어 그 중턱에 대규모의 신작로가 뚫리는데, 그 동강난 양편의 산기슭이 정주사의 가족들과 명님이네와 같은 조선 빈민들이 모여 살던 조선인 거주 지역이었다. 인구 칠만 명 가운데 육만도 넘는 조선인들이 주변부 산비탈로 밀려나 다닥다닥 붙은 오막살이에서 어깨를 비비며 옴닥옴닥 모여 사는 존재로 그려낸 것은, 작가 채만식이 이원화된 공간 분할의 위계적인 구조를 당시 식민지 조선의 가장 핵심적인 사회적 증상으로 파악한 결과라 하겠다. 그런 점에서 채만식『탁류』를 통해 그려낸 1930년대 군산의 도시 구조는 중심부와 주변부, 고지대와 저지대, 근대적 공간과 전근대적 공간, 지배 세력과 피지배 세력, 근대식 건물과 오막살이 사이의 대립과 갈등과 부조화가 극심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탁류』의 문화 관광 자원으로서의 가치]

1. 채만식 문학관 활성화 방안

2001년 개관한 채만식 문학관은 군산시가 설립하여 직접 운영하고 있는 관 주도형 문학관이라 할 수 있다. 채만식 문학관은 기본적으로 군산 시청에 소속된 공무원이 파견 나와 시설 관리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재정 지원이나 인력 운용의 측면에서 우리나라의 다른 문학관에 비해 나은 편에 속한다. 그렇지만 채만식 문학관은 이러한 양호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운영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문학관 관람객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배려도 부족한 실정이다. 게다가 전시실에는 보존가치가 있다거나 전시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는 유품이나 자료들을 구비하고 있지 않다. 문학관이 단순한 박물관이나 전시관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전시와 관람을 중시로 한 소극적인 문학관 운영모델에서 과감히 탈피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채만식 문학관 활성화 방안과 관련하여 가능한 운영 모델 네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채만식 문학관의 설립 배경을 활용하여 군산 지역의 특색있는 종합 축제를 만들어 볼 수 있다. 그 모델로는 채만식 문학제 혹은 백릉 문학제를 기획하여 개최하는 방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그 내용은 채만식 학술제, 백일장 대회, 채만식 문학캠프, 향토 작가나 지역 전문가와 함께 하는 문학 강연과 채만식 문학 탐방, 오페라 『탁류』 감상회, 채만식 문학상 수여, 군산의 근대사 이해 등으로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군산 지역의 다양한 문화 행사를 문학관과 연계시켜 종합 문화제로 키워나간다면 상당한 수준에서 지역 활성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지역의 역사, 사회, 문화와 관련한 교양 강좌를 개발하여 지역민과 방문객에게 다가갈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볼 수 있다. 문학관은 관련 분야의 전문가를 섭외하여 채만식 문학과 우리 근대 문학을 소개할 수 있는 강의를 개발하는 한편 이를 확장하여 식민지 시대 지식인들의 입장과 일본의 경제적 수탈과 관련한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채만식 문학관은 청소년을 위한 훌륭한 보조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기존의 보여주기 위한 형식적인 전시실 운영에서 벗어나 채만식 문학과 근대 문학 연구의 중심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방향을 마련해 볼 수 있다. 채만식 문학 연구자들을 위한 편의제공이라는 차원에서 그리고 이를 통한 지역 활성화의 일환으로 채만식 문학 관련 자료를 총망라하여 수집하여 필요한 연구자들에게 제공하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 사정이나 문학관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관련 전문가에게 연구 과제를 주어 연구하게 하고, 이를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해 나가야 할 것이다.

셋째, 전라북도 지역의 다른 문학관과 연대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운영해 볼 필요가 있다. 김제의 아리랑 문학관, 고창의 미당 문학관, 전주의 최명희 문학관, 남원의 혼불 문학관 등은 문학관 연대에 있어 좋은 협력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아리랑 문학관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작품인 『아리랑』과 최명희 문학관과 혼불 문학관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혼불』이라는 작품은 모두 채만식『탁류』와 비슷한 시기의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들 작품에서 중요한 화두는 수탈, 민족, 농민, 일제 강점 등의 문제이다. 이러한 동일한 주제들을 바탕으로 전북 지역의 문학관을 한데 묶을 수 있다면, 우리나라 문학관 연대의 중요한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작가 관련 답사로나 『탁류』 관련 답사로를 만들어 볼 수 있다. 채만식은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랐으며, 이 지역을 소재로 한 작품을 남겼다. 현재 채만식이 태어났던 집터를 비롯하여 그가 살았던 장소가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장소는 실제로 추정하여 복원이 가능한 곳이다. 그러므로 문학관은 다양한 방식을 동원하여 채만식의 삶의 흔적과 『탁류』를 비롯한 작품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에 장소의 상징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채만식 문학 관련 답사로’를 구성하는 데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며 지역 문화제의 중요한 프로그램 개발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2. 탁류길 답사 코스

『탁류』의 전반부 무대가 되었던 군산은 아직도 시내 곳곳에 작품에 등장하던 당시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탁류길 답사로’를 만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탁류』의 인물과 관련된 세 가지 답사 코스를 제안하고자 한다.

A 정주사가 거닐던 탁류길 : 미곡 취인소[미두장, 옛 조선 은행 건물 맞은편] → 째보 선창[옛 진포 나루] → 미두장 모퉁이 → 전주통 동녕 고개[元町] → 옛 경찰서 네거리 → 소화통 개복동 복판 → 콩나물 고개 → 한참봉 싸전 가게 → 둔뱀이 언덕 비탈 → 정주사집[선양동창성동 옛름 다리 중간] → 채만식 문학관

B 초봉이가 거닐던 탁류길 : 제중당 약국[옛 군산역 앞] → 제일 보통학교[현 군산 중앙 초등학교] 앞 → 둔뱀이 언덕 비탈 → 정주사집 → S여학교[현 군산 여자 고등학교] → 공회당[옛 군산 상공 회의소] → 도립 병원[현 군산 해양 경찰서] → 채만식 문학비[월명 공원] → 큰 샘거리[대정동] 초봉의 신혼집[중앙로 흥국 생명 옆]

C 고태수와 장형보가 거닐던 탁류길 : 조선 은행 군산 지점[현 백년 광장 옆] → 미두점 거리 → 개복동 어귀 기생 행화의 집 → 공원 밑 터널[현 해망굴] → 불이촌은적사[소룡동] → 개복동 초입 → 한참봉 싸전 가게[콩나물 고개 중턱] → 둔뱀이 언덕 비탈 → 금호 의원[옛 군산역 앞 사거리] → 채만식 문학관

정주사와 초봉이가 살았던 둔뱀이를 가려면 1930년대 개복정(開福町)이라 불리던 개복동 극장 거리로부터 고태수가 드나들던 기생 행화와 명님이네 유곽을 지나 콩나물 고개를 거쳐가는 방법과 시내로 통하는 소화정[현재 중앙로]을 따라 내려가다 제일 보통학교[현재 군산 중앙 초등학교] 앞을 지나 군산 영광 여자 고등학교를 향해 비탈을 오르는 방법이 있다.

3. 탁류가 지니는 문학사적 가치와 문화 관광 자원으로서 활용방안

식민지 시기 쌀은 군산이라는 도시의 성장 배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군산이라는 도시를 인근 배후 지역의 중심지로 만들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쌀과 군산의 결합은 식민지 시대의 우리나라 민중들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다. 채만식의 대표 소설 『탁류』의 전반부는 그러한 군산을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쌀을 둘러싼 갈등 자체가 작품의 중요한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작품 속에서 쌀과 민중은 식민지시기 우리민족의 삶 전체와 관련하여서 나아가 이 지역의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겠다. 특히 채만식 문학의 경우, 군산의 개항과 초창기 발전과 관련지어 말할 수 있는 부분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와 관련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학생들의 체험 학습 관광, 지역과 사회를 연결하는 답사로 탐방 등]을 개발하고 마련할 수만 있다면, 지역민의 정서를 하나로 묶어내는 훌륭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문학관 주도의 이러한 활동은 교육적인 성과뿐만 아니라 문학 장소로서의 군산의 상징성을 더 크게 할 것이며, 그럴 경우 문화 관광 자원으로서의 활용가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높아질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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