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5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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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錫度 |
영어음역 | Song Seokdo |
이칭/별칭 | 삼농(三農)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정진 |
[정의]
서울특별시 구로구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복지가이자 교육자.
[개설]
송석도(宋錫度)의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1918년 충청남도 대덕군에서 출생하여 아버지 송후용과 어머니 성낙희의 장남으로 태어나 2001년 사망하였다.
송석도는 14세 때인 1931년에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오류리[지금의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2동]에 정착하였다.
[활동사항]
1934년 송석도는 소작농으로 자립 경영을 시작하였고, 1937년 유축 다각 영농(有畜多角營農)의 의지를 품고 처음 암소를 구입하였다. 1945년에 초지를 이용하여 육우 및 비육우 목장인 송농장을 개설하였다. 송농장은 송석도가 품팔이를 하면서 익힌 노동 경험과 일본인 농장에서 익힌 기술을 기반으로 소작지를 넓힌 뒤 우리 농촌 피폐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 대책으로 ‘농한기 없는 농사, 흉년 없는 농사, 남용 없는 농사’를 실현해 보고자 설립되었다.
송농장에서는 주로 과채류의 촉성 재배와 포도 농사를 하였고, 부수적으로 가축도 사육하였다. 농장에서 생산된 농축산물은 영등포, 인천, 남대문뿐만 아니라 멀리는 평양, 원산, 함흥, 만주에도 판매되었다. 송석도는 농장과 목장을 운영하면서 이상 농촌 건설을 일궈 낼 일꾼을 양성하는 데 힘을 기울이는 한편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가졌다.
송농장은 해방을 전후하여 오류동 일대에 있었던 농장으로 선진 농법을 도입하였고, 지역 사회에 내려 작물 농사와 가축 농사의 기술을 터득, 농민들에게 보급하여 과채류 생산과 유축 다각농의 전파로 농가 소득 증진에 기여하였다.
송석도는 송농장을 경영하면서 1946년 오류농산협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선임되었다. 송석도는 농업과 축산업뿐만 아니라 아동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 삼농이라는 송석도의 호에서 알 수 있듯 ‘작물 농사, 가축 농사, 사람 농사’를 실천하여 지역 발전에 큰 구실을 하였다.
1947년 농장 부설 신영농사학원을 설립하여 농촌 청년들에게 덴마크식 국민고등학교 교육을 실시하였다. 1949년 서울우유동업조합 이사에 선임되어 이후 17년간 재선되어 활동하였고, 같은 해 오류유치원을 설립하여 원장으로서 어린이 교육에 헌신하였다.
농장이 안정기에 들어설 무렵 6·25전쟁이 일어나 많은 고아가 발생하자 1951년 사유 농장을 재단법인으로 전환하고 농장 자리에 오류애육원을 설립하였다. 1953년 사재를 털어 오류중학원을 설립하여 원장으로서 지역 사회의 가난한 아동들을 교육하는 데 힘썼다. 또한 1953년 부천군 소사읍의회 의원으로 당선에 이어 소사읍 의장으로 선출되어 지방자치에 참여하였다. 1957년 오류동농업협동조합 조합장, 1959년 부천군 4-H구락부지도위원회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960년 경기도 농사교도위원회 위원, 1963년 농림부농산물가격심의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64년 서울특별시 4-H지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서울특별시 농촌진흥위원회 및 농업증산대책본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66년 오류지역농촌개발위원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970년 오류동 응골개발위원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71년부터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전궁리에 황무지 92,562.4㎡를 개간하기 시작하여 삼애농원(三愛農園)을 조성하여 농장과 목장을 경영하였다. 1976년 사단법인 한국낙농협회 창설 발기인 대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985년 서울특별시 축산협동조합 이사로 피선되었다.
[상훈과 추모]
송석도는 사회 공익 포장증 및 훈장, 3·1문화상[근로 건설 부분], 은탑 산업훈장, 국민훈장 목련장 등 다수의 상을 수상하였다. 우리나라 농촌 운동의 선구자 유달영(柳達永) 박사는 오류애육원을 설립한 송석도에게 삼농(三農)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또 송석도가 사망한 뒤 5년 후인 2006년 7월 17일 삼농 송석도 선생 흉상건립추진위원회에서 오류애육원 마당에 흉상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