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140
한자 光州驛廣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무등로 235[중흥동 611-14]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임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98년 1월 12일연표보기 - 광주역 광장 5.18 사적지 제2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2년 - 광주역 영업 개시
현 소재지 광주역 광장 - 광주광역시 북구 무등로 235[중흥동 611-14]지도보기
성격 역 광장
문화재 지정 번호 5.18 사적지 제2호

[정의]

1980년 5월 20일 밤 시위대와 계엄군과의 치열한 공방전으로 집단 발포가 있었던 곳.

[개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속도로가 마비되자 광주역은 서울로부터의 병력과 보급품 수송을 위한 철도 운송의 요충지로 기능하였다. 1980년 5월 20일 밤 벌어진 시위는 전라남도청광주역 두 군데로 집중되었다. 계엄군이 두 곳만 집중 방어하였기 때문이었다.

5월 20일 저녁 7시경 제3공수여단은 광주역 부근에 16대대 병력을 배치하였다. 밤 10시경 시위대의 공격 수위가 높아졌고, 광주역을 향해 돌진하던 시위대 트럭에 하사관 3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소식은 빠르게 공수부대원들 사이에 퍼졌다. 시위대의 저항이 격렬해지자 제3공수여단 모든 병력을 광주역으로 집결시켰다.

16대대가 방어하던 신안사거리에서는 시위대의 화물 트럭에 깔려 공수부대원 1명이 사망하였다. 5.18민주화운동 기간 중 최초로 사망한 계엄군이었다. 동료가 사망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계엄군의 대응이 훨씬 과격해졌고, 광주 지역에 배치된 공수부대 대대장들은 무전으로 실탄 지급을 요청하였다. 당시 최세창 제3공수여단장은 "위협용으로 사용하되, 위협용 이외에 사용할 때는 사전에 보고하라."는 지시와 함께 실탄을 지급하였다.

광주역에 배치된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하였다. '최초의 집단 발포'가 5월 20일 밤, 광주역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 날 총에 맞아 숨진 사람은 5명이었고, 부상자는 최소한 11명이 넘었다. 공수부대원도 1명 사망하였다.

[건립 경위]

광주역은 1922년 7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으며, 1936년 3월 1일 국철(國鐵)로 이관되었다. 2004년 4월 1일 KTX 열차 운행이 시작되었으나, 2015년 호남고속선의 개통에 따라 KTX 정차역이 광주송정역으로 일원화되었다.

[위치]

광주역 주변에 광주효동초등학교, 광주용봉초등학교, 광주서림초등학교, 광주북성중학교, 전남대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 등 다수의 교육기관이 있다.

[현황]

현재도 광주~목포 구간을 잇는 광주선의 기차역으로 남아 있다. KTX 착발이 광주역에서 광주송정역으로 바뀐 후 유동 인구는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의의와 평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시위대를 향한 첫 집단 발포가 있었으며, 다수의 시민 사망자와 함께 첫 계엄군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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