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실 무등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903
한자 石室無等山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황민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320년 - 나옹화상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376년 - 나옹화상 사망
배경 지역 무등산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지도보기
성격 한시
작가 나옹화상

[정의]

고려 후기 원나라 연경의 광제선사 주지, 회암사 주지 등을 지낸 승려 나옹화상이 전라도 광주 지역에 있는 무등산 보조석굴을 방문하고 쓴 한시.

[개설]

「석실 무등산(石室無等山)」을 지은 나옹화상(懶翁和尙)[1320~1376]의 속명은 아원혜(牙元惠), 호는 나옹(懶翁). 법명은 혜근(惠勤)이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출가하여 전국의 사찰에서 정진하다가, 1344년 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巖寺)에서 크게 깨닫고, 석옹(石翁)에게 깨달음을 인가(印可)받았다. 1347년 원나라 연경(燕京) 법원사(法源寺)에서 4년간 인도승 지공의 지도하에 지내다가 1350년 평강부(平江府) 휴휴암(休休庵), 복룡산(伏龍山)의 천암장(千巖長) 등에서 정진하며 법론을 벌였다. 원나라 순제(順帝)의 임명으로 연경의 광제선사(廣濟禪寺) 주지로 지내다가 1358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머물다가, 공민왕의 청으로 잠시 신광사(神光寺)에 머무르면서 설법과 참선으로 후학을 지도하던 중 홍건적으로부터 신광사를 수호하였다. 1361년부터 용문산·원적산·금강산 등지를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왕명으로 밀성(密城)[현 경상남도 밀양 지역] 영원사(塋源寺)로 옮겨가던 중 법랍 37세[속세 나이 56세]인 1376년 5월 15일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제자로는 자초(自超)·지천(智泉)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 1권과 『가송(歌頌)』 1권이 있다.

「석실 무등산」은 나옹화상의 한시 작품으로, 시에서 표현한 무등산 석실은 무등산의 규봉암과 지장암 사이 지공너덜 아래에 있는 석굴이다. 이 석굴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이 수도하였다고 해서 보조석굴이라고도 하며, 수행자들의 수도장으로 쓰였다. 「석실 무등산」은 고려 후기 무등산 석실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시이다.

[구성]

「석실 무등산」은 1구에 7자씩 모두 8구로 이루어진 칠언율시이다.

[내용]

석실 무등산(石室無等山)[무등산 석실]

전체견뢰수주출(全體堅牢誰做出)[단단한 이 집을 모두 누가 만들었을까]/ 미분천지이안연(未分天地已安然)[천지가 나눠지기 전부터 편안했으리]/ 공공사벽천천세(空空四壁千千歲)[텅텅 빈 사방 벽은 천년 세월이요]/ 역력삼연만만년(歷歷三椽萬萬年)[역력한 서까래는 만년을 이어온 듯]/ 겁겁외외무산괴(劫劫巍巍無散壞)[겁겁을 솟구쳐 올라도 무너지지 않고]/ 시시낙락불영천(時時落落不零穿)[시시각각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으니]/ 함용법계능관확(含容法界能寬廓)[베풀고 용서하는 법계 넓고도 넓어서]/ 고왕금래현우현(古往今來玄又玄)[고금이 왕래하도록 현묘하고 현묘하네]

[의의와 평가]

「석실 무등산」은 나옹화상의 시 세계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고려 후기 무등산보조석굴을 표현하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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