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7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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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노성태 |
[정의]
1392년부터 1910년 일본에 의하여 국권을 강탈당할 때까지의 전라도 광주 지역의 역사.
[명칭 변화]
‘광주’라는 명칭은 고려시대인 940년(태조 23) 처음 사용된 이후 해양·익주·화평·무진으로 불리었으며, 목(牧)·부(府)·주(州)·현(縣) 등 등급의 변화가 빈번하였다. 1373년(공민왕 22) 광주목이 되면서 목사가 파견되는 큰 고을이 되었는데, ‘광주목’은 조선 초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선시대 전라도 광주 지역의 고을 호칭은 다소의 변화는 있었지만, 고려시대만큼 많지는 않았다. 1430년(세종 12) 고을 백성 노흥준이 광주목사 신보안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광주목은 무진군으로 강등되었다가, 1451년(문종 원년)에 전라도 광주 출신 필문 이선제 등의 노력으로 다시 광주목으로 복구되었다. 광주목으로의 복구를 축하하기 위해 광주읍성 안에 건립된 정자 이름을 ‘기쁘고 경사스럽다.’라는 의미를 담아 ‘희경루(喜慶樓)’라고 짓기도 하였다.
1489년(성종 20)에는 판관 우윤공이 화살을 맞는 사건으로 인해 광주목은 다시 광산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501년(연산군 7)에 광주목으로 복구되었다. 이후 1624년(인조 2)에 다시 현으로 강등되고 1634년(인조 12)에 복구되는 등의 변화를 겪었으나 군현의 영역 등은 큰 변화없이 조선 말까지 유지되었다.
[행정 체계]
광주의 행정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축조된 광주읍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광주읍성은 둘레가 2㎞, 높이가 3m 정도로 네모반듯한 방형이었다. 무등산에서 가져온 돌로 쌓은 석성으로 동쪽에 서원문(瑞元門), 서쪽에 광리문(光利門), 남쪽에 진남문(鎭南門), 북쪽에 공북문(拱北門)이 있었다. 광주읍성 안에는 동서남북에 있는 성문을 잇는 십자형의 도로가 있었고, 성벽 주변에는 해자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광주읍성 안은 광주목사의 근무처인 동헌과 휴식 공간인 객사 등 각종 통치 시설이 모여 있었다. 광주읍성의 북쪽에는 바람을 막는 방풍림인 유림수와 농업용수를 해결하기 위해 경양지(景陽池)를 만들었다. 교통·통신과 관련하여 경양역과 선암역이 설치되었고, 인조의 넷째 아들 용성대군의 태를 묻은 태봉산이 있었다.
한편 조선 태종대에 광주 고내상(古內廂)[지금의 송정비행장]에 전라병영이 설치되었다가, 1417년(태종 17)에 강진으로 옮겨졌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광주에 병영이 설치되었음은 광주가 조선 초기 군사적 요충지로 파악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조선 초기 전라도 광주 지역의 인구 규모는 890호에 장정 4,182명이었다. 당시 1,000호 이상이어야 목(牧)이 되는 일반적인 관례와 비교해 보면 광주의 인구 규모는 조금 부족하였다. 조선 초기 광주의 토지 품등에 대해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토지가 척박하였다.”라고 하였고, “간전(墾田)[개간한 밭]은 10,880결이며 수전(水田)[논]이 많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895년(고종 32) 지방 제도의 개편으로 23부제가 실시되면서 전라도는 나주부·전주부·남원부로 나뉘게 되고, 광주는 광주군으로 개편되어 나주부 예하에 속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896년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시행되면서 전라도는 전라남·북도로 나뉘게 되었고, 전라남도의 관찰부가 광주에 설치되었다. 이때부터 관찰부가 설치된 광주는 나주를 제치고 전라남도 지역의 행정은 물론이고 사법과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광주에 관찰부가 설치되자 나주에 있던 나주 재판소도 광주로 옮겨지게 되었다.
[신종교의 확산과 근대식 교육기관의 도입]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전라도 광주 지역에 널리 퍼졌으며, 동학교도들과 농민이 중심이 된 동학농민운동 역시 광주 일대가 중심 활동지 중 하나였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1904년 광주 선교부, 1905년 나주 선교부, 1910년에는 순천 선교부가 개설되었다. 1904년 광주에 들어온 선교사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과 오웬[한국명 오기원]은 광주 양림산 자락에 터를 잡았다. 오늘날 양림동을 서양촌이라 부르게 된 이유이다.
한편 1895년(고종 32)에 발표된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에 따라 1896년 광주에 향교의 부속건물인 사마재를 빌려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 소학교[지금의 광주서석초등학교]’가 들어선 이후 선교사 유진 벨이 건립한 숭일학교 및 수피아여학교를 비롯하여 공립학교인 농업학교,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공립여자보통학교·전라남도공립사범학교 등이 개교되면서, 광주는 교육도시로 불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