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석산기」[염재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370
한자 遊瑞石山記[廉在慎]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고성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862년 - 염재신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935년 - 염재신 사망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92년 - 염재신 무등산 유람
배경 지역 무등산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지도보기
성격 기행문
작가 염재신

[정의]

근대 학자 염재신이 전라도 광주 지역에 있는 무등산을 유람하고 지은 글.

[개설]

「유서석산기」를 지은 염재신(廉在愼)[1862~1935]의 자는 경여(敬汝), 호는 과암(果庵)이며, 본관은 파주(坡州)이다. 아버지는 염민환(廉民煥)이고, 전라남도 보성군 봉덕면 내동리[현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양동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큰아버지인 염길환의 집에서 자랐다. 월파(月波) 정시휴(鄭蓍休)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에게 수학하였다. 산수 유람을 좋아하여 관동팔경, 내외금강, 영남의 청도, 호남의 고흥팔경, 화순 동복의 물염정 등을 두루 돌아보았다. 저서로 『과암유고(果庵遺稿)』 4권 1책이 있다. 「유서석산기」는 『과암유고』 권3에 실려 있다.

[구성]

「유서석산기」는 유산의 동기와 주상절리의 형상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1. 유산의 동기

염재신무등산을 유람한 동기를 뚜렷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다만 출발한 날짜와 행적 정도만을 언급하고 있다. 1892년 7월 어느 날에 족손 수학과 사문 이용호와 함께 화순 동복의 물염정에서 출발하여 규봉을 오른 것으로 기록하였다.

2. 주상절리의 형상

염재신은 규봉의 주상절리 및 주변의 암석 등을 주로 표현하였다. 다음은 규봉과 광석대, 풍혈대, 석실 등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비유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문 번역]

규봉은 곧 서석산중봉이다. 좌우를 둘러선 병풍인 듯 장막인 듯한 천 길의 바위 벼랑이 있는데, 그중에서 우뚝 높이 일어난 것이 규봉암이다. 암자에는 금명이라 불리는 한 노승이 있어 공대(恭待)를 꽤 후하게 하였다. 암자의 동편으로 100여 명은 앉을 수 있는 평평한 돌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광석대이다. 광석대의 북쪽으로 10여 둘레의 거대한 바위가 있는데, 그 가운데로 조개 창자와 같은 모양의 큰 구멍이 빙 둘러 위로 수십 길이었다. 구멍으로부터 대(臺) 위를 올라가니 충분히 평평하고 넓어서 50~60인은 앉을 수가 있는데, 구멍 속에서 바람 소리가 나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사계절을 통하니 이곳이 바로 풍혈대이다.

[특징]

「유서석산기」의 '서석산'은 무등산을 이르는 이칭(異稱)이다. 「유서석산기」무등산의 다양한 곳을 보여주기 보다는 관심 있는 몇 곳을 소개하고 있다. 그 수가 적어 아쉬움이 느껴지나 승경 묘사에서 비유법을 사용함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의의와 평가]

「유서석산기」무등산을 다양한 비유와 예시를 사용하여 그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적 짧은 길이의 유산기임에도 불구하고 무등산 관련 유산기로서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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