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759
한자 范世東
영어공식명칭 Beom Sedong
이칭/별칭 여명(汝明),복애(伏崖),문충(文忠),후덕군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문다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369년 - 범세동 과거 급제
추모 시기/일시 1825년 - 범세동 복룡사에 배향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8년 - 범세동선생묘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3호로 지정
출생지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 지도보기
묘소|단소 범세동선생묘 -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 산94-1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용호사 -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 314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복룡사유허비 -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 314 지도보기
성격 문관|학자
성별
본관 금성
대표 관직 덕령부윤|간의대부

[정의]

고려 후기에 덕령부윤, 간의대부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조선 전기에 성리학을 연구한 학자.

[가계]

범세동(范世東)[? ~ 1397?]의 본관은 금성(錦城), 자는 여명(汝明), 호는 복애(伏崖),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아버지는 통찬(通贊) 범후춘(范後春)이다. 범세동의 8세손 범천배(范天培)가 1545년경 나주(羅州) 시랑골[侍郞谷]에서 생용마을[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 일대]로 옮겨 금성범씨 동족마을을 이루었다.

[활동 사항]

범세동은 1369년(공민왕 18) 과거에 급제하여 덕령부윤(德寧府尹)·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을 지냈다.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가 나주[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로 돌아왔다. 조선 태종(太宗)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제수하는 등 여러 번 벼슬을 권하였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고려에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숭앙받았다.

[학문과 저술]

범세동은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제자였으며, 성리학 연구를 통해 원천석(元天錫)[1330~?]과 함께 『화해사전(華海師全)』을 편집하고, 『동방연원록(東方淵源錄)』을 편찬하였다.

[묘소]

범세동선생묘’가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 산94-1번지에 있다. ‘범세동선생묘’는 1998년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범세동은 사망 후 후덕군(厚德君)에 봉해지고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았으며 개성의 표절사(表節祠)·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 광주광역시의 복룡사(伏龍祠)에 제향되었다. 복룡사는 1825년(순조 25)에 건립되었으나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14년 후손들이 복룡사의 일부인 용호재(龍湖齋)를 재건하였다. 현재 복애범선생복룡사유허비(伏崖范先生伏龍祠遺墟碑)만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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