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2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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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之湖 |
영어공식명칭 | O Jiho |
이칭/별칭 | 오점수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허경 |
출생 시기/일시 | 1905년 - 오지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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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31년 - 오지호 도쿄미술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 오지호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 재직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 오지호 전라남도 광주부로 이주 |
활동 시기/일시 | 1949~1960년 - 오지호 조선대학교 교수 재직 |
몰년 시기/일시 | 1982년 - 오지호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0년 - 오지호 남부군 빨치산으로 1년 넘게 활동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1년 - 오지호 4.19혁명 예비 검속으로 1년 가까이 투옥 |
학교|수학지 | 도쿄예술대학 - 일본 도쿄 다이토구 |
활동지 | 송도고등보통학교 - 황해도 개성부 |
활동지 | 조선대학교 - 광주광역시 동구 필문대로 309[서석동 375] |
성격 | 대학교수|서양화가|미술 이론가 |
성별 | 남 |
본관 | 동복 |
대표 경력 |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조선대학교 교수 |
[정의]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빛과 생명을 근간으로 한국적 인상주의를 구현한 화가.
[개설]
오지호(吳之湖)[1905~1982]는 전라남도 화순군 출신으로 본관은 동복(同福), 본명은 점수(占壽)이다. 일본 도쿄미술학교[지금의 도쿄예술대학]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조선의 색을 탐구하며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9년부터 1960년까지 조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호남 화단의 형성과 발전에 구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국의 빛을 근간으로 한국적인 인상주의 정착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일제강점기, 8.15광복, 6.25전쟁이라는 역사의 격동기를 살아가면서 예술가의 지조를 지키고 올곧게 행동한 지식인이다.
[활동 사항]
1931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오지호는 1932년 제2회 녹향회(綠鄕會) 전시에 참여하여 조선의 색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1935년부터 1944년까지 황해도 개성부에 있는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한국의 미와 자연의 생명감을 담은 「사과밭」[1937], 「남향집」[1939] 등의 작품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김주경과 함께 한국 최초의 컬러 화집인 『오지호·김주경 2인화집』[1938]을 발간하였다.
1948년 전라남도 광주부에 정착하여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1949년부터 1960년까지 조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 등 호남 화단의 형성과 발전에 구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6.25전쟁 기간 중 오지호는 1950년 가을부터 남부군 빨치산으로 활동하며 1년 넘게 지리산에 머물렀다. 6.25전쟁이 끝난 뒤 다시 조선대학교에 복귀하였으나 1960년 4.19혁명 이후 교수직을 그만두고 작품 활동에 전념하였다. 이듬해 일어난 5.16군사정변 때에는 4.19혁명에 대한 예비 검속에 걸려 1년 가까이 투옥되었다.
오지호는 미술 이론가로서의 활동도 주목되는데, 1938년 8월 20일부터 9월 4일까지 『동아일보』에 「순수회화론」을 10회에 걸쳐 발표하였고, 1939년 5월 31일부터 6월 7일까지 『동아일보』에 「피카소와 현대회화」를 5회에 걸쳐 발표하였다.
1968년에는 미술 논문집 『현대회화의 근본문제』[예술춘추사]를, 1969년에는 이희승·김상기 등과 함께 한국어문교육연구회를 창립하고 한자교육 부활과 국한문 혼용을 주장하는 논문집 『국어에 대한 중대한 오해(誤解)』[한국어문교육연구회]를 1971년에 발간하였다.
[저술 및 작품]
1968년 『현대회화의 근본문제』[예술춘추사], 1971년 『알파벳 문명의 종언』[삼연사], 1971년 『국어에 대한 중대한 오해』[한국어문교육연구회], 1992년 『미와 회화의 과학』[일지사]을 발간하였다. 작품으로는 1929년 「시골소녀」, 1936년 「처의상」, 1937년 「도원풍경」, 1939년 「남향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