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A020203 |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설월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학 |
[우마차에 똥 탱크 싣고 인분 구하러 다녔지]
6·25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까지 설월리 일대 사람들은 여전히 논농사를 생업으로 꾸려 나가고 있었다. 현재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이 들어선 자리는 ‘멍석뜰’이라 불리던 논자리로, 구름산과 도고산에서 내려오는 한내와 한강으로 흘러드는 안양천이 자리하고 있는 그야말로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그렇다고 설월리 사람들이 논농사에만 매달렸던 것은 아니다. 부농도 있었지만 대부분 소작농이었던 사람들은 산자락에 이어지는 밭을 일구어 파와 배추, 무 등 다양한 채소도 재배했다.
특히 예부터 설월리에서 재배되는 포도가 달고 맛있어 인근에서는 유명했다. 30여 년간 포도 농사를 지었다는 김옥섬[1936년생] 씨의 경우, 처음에는 영등포나 시흥시장에 직접 포도를 내다 팔았으나 나중에 포도가 유명해지자 대부분 상인들이 직접 와서 밭떼기로 넘겼다고 한다. 최문락[1939년생] 씨는 똥 탱크를 우마차에 싣고 여기저기 인분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밭농사가 많았다는 얘기다.
지금도 설월리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텃밭의 규모를 넘어서 여러 가지 채소를 가꾸는 집들이 꽤 많은 걸 볼 수 있다. 봄에는 봄나물부터 상추와 고추 등을 심고, 가을이면 밭마다 파며 무며 배추가 그득하다.
[안서중학교가 문을 열다]
개항기 운양의숙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서면공립보통학교 개교로 이어지는 서면 주민들의 교육열은 대단해서, 면민들이 사재를 털어서까지 기부하여 교사를 신축하는 열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50~1960년대 설월리의 교육 환경은 열악해졌다. 면소재지임에도 변변한 중학교 하나 없었다. 최문락 씨에 따르면, 이 때문에 서면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대부분 외지인 영등포나 안양 방면으로 진학을 했다고 한다.
1969년 소하리에 안서중학교가 개교할 때까지 이러한 상황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공립중학교인 안서중학교는 6학급으로 개교하여 1972년 첫 졸업생을 배출한 이래 이 지역의 대표적인 중학교로 자리 잡았다. 현재 소하동에는 안서중학교를 포함해 소하중학교[1997년 개교], 광명정보산업고[1980년 개교], 소하고등학교[1997년 개교], 충현고등학교[1997년 개교]가 들어서 있다.
[기아주택의 물탱크]
1970년대 초는 온 나라가 새마을 운동으로 들썩이고 있던 때였다. 면소재지이긴 했지만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던 설월리는 당시 변변한 수도 시설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름산 줄기에서 내려오는 시냇물과 참샘물약수터에서 맑고 시원한 물이 솟고 있는 터라 빨래며 식수 확보에는 큰 불편이 없었다.
개발의 광풍은 설월리에도 몰아 닥쳤다. 소하리 넓은 벌판에 기아자동차 공장이 들어서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설월리 인근 산을 깎아 기아자동차 사원들의 기숙사인 ‘기아의 집’이 지어졌다.
그러자 설월리 주민들은 기어이 구름산 중턱 절터 물에서 파이프로 물길을 끌어다 기아의 집 언덕에 물탱크를 앉혔다. 거기서 물을 받아서 동네에 필요한 수돗물을 공급했으니, 개발의 혜택을 수돗물로나마 짜릿하게 맛보았을 것이다. 지금은 물탱크의 수도를 잠가 놓아 유명무실해졌지만, 지금도 물탱크는 비상 식수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마을 주민 김정관[1932년생] 씨가 말해 주었다. 김정관 씨에 따르면, 당시 설월리에서도 새마을 사업이 진행되면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지붕 개량 사업과 마차가 통행하기에 수월하도록 도로 확장 사업 등이 벌어졌다고 한다.
[서천극장을 아시나요]
1970년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이 설월리에 건립되면서 주변 지역 청년들이 기아자동차에 입사하였다. 새로운 산업 인력 층의 등장은 설월리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젊은이들의 문화 소비 욕구는 1971년 소하리에 광명시 최초의 극장인 400석 규모의 서천극장이 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그 해 관람객 수는 7만 3885명으로 같은 해 개관한 개봉극장의 관객 수 1만 6028명을 크게 웃돈다. 많은 시민이 서천극장을 선호했음을 보여 주는 통계이다. 이마도 관객의 인기를 끄는 영화들이 많이 상영되었기 때문인 듯도 하지만 설월리 주민들로서는 농촌에서 도시로 변모하는 활기를 느끼려고 갔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3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상황은 바뀌었다. 서천극장은 1997년 운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폐관되었고, 서천극장 터는 현재 소하1동 아파트 단지에 편입되고 말았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