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B03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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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능말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덕묵 |
[어린 시절의 추억]
1938년생인 강진근 씨는 2010년 현재 일흔세 살이다. 금천강씨 31세손으로 조상들은 대대로 능촌[아방리·능말]에서 거주해 왔다.
강진근 씨의 선친은 집안의 장남이었지만, 어머니와 결혼한 후 빈손으로 서울로 나가 사업을 시작했다. 빈손으로 올라간 탓에 어머니가 낮이면 재봉틀로 삯바느질을 하고 밤이면 서점을 운영하여 아버지의 사업을 뒷바라지했다.
강진근 씨의 외가는 안산에 있었는데, 집안이 부유하여 어머니가 삯바느질에 쓸 재봉틀도 외가에서 마련해 주었다. 어머니는 시집오기 전에 구학문을 많이 배워서 한학에도 능했다. 강진근 씨가 서당에 다니면서 글을 읽으면 어머니가 듣고서 잘못을 지적할 정도였다. 어머니가 서점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강진근 씨의 아버지는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 크게 제재소를 했다. 강진근 씨는 아버지 사업이 성황을 이루던 1938년 서울 종로5정목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강진근 씨가 네 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동업으로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사업을 정리한 후 가족을 이끌고 서울 구로동으로 내려왔다.
구로동 집은 초가였지만 스물두 칸이나 되어서 방을 여덟 개나 세 줄 정도로 규모가 컸다. 그러나 8·15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뒤이어 6·25전쟁이 터졌다.
[아방리[능말]에 정착하다]
6·25전쟁이 터질 무렵 강진근 씨는 구로에서 영등포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전쟁이 나자 가족들은 아버지의 고향인 아방리[능말]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그게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아방리[능말]에는 할아버지를 비롯해 작은아버지 등 금천강씨 일가들이 20여 호 정도 살고 있었다. 전쟁 후 강진근 씨 가족은 다시 구로동 집으로 돌아갔지만, 전쟁통에 집이 불타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구로에 있는 양초 공장에 임시로 들어가서 한쪽에 가마니를 깔고 지내다가 도저히 살 수가 없어 아방리[능말]로 다시 내려오게 되었다.
아버지가 장남이었지만 오랫동안 서울로 나가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작은아버지가 농사를 도맡아 짓고 있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강진근 씨 가족에게 당신이 짓던 땅을 조금 나누어 주었다. 또한 할아버지는 제법 규모가 큰 집에서 살았는데, 작은아버지네 식구가 많아서 할아버지가 살던 큰집을 물려받았고, 강진근 씨 네는 식구가 별로 없어서 따로 집을 얻어 살았다. 강진근 씨 가족이 살았던 집은 ‘왼ㄱ’자형으로, 방 셋, 부엌 하나, 우물과 변소, 장독대 등이 딸린 집이었다.
당시 아방리[능말]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어서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때는 늘 먹을 것이 부족해서 ‘풋바심’을 해서 먹곤 했다. ‘풋바심’이란 곡식이 다 익기도 전에 일찍 베어다가 먹는 것을 말하는데, 벼나 보리도 익기 전에 베어서 먹었다. 그때는 정말이지 하루라도 빨리 먹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풋곡식을 털어서 방아를 찧으면 알맹이가 다 부서져 버린다. 그러니까 풋곡식을 털어서 솥에 쪄서 말린 후 방아를 찧으면 덜 익은 것도 부서져서 가루가 되지 않는다. 그걸 ‘풋바심’이라고 한다.
마을이 서울 근교에 위치해 있다는 장점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나무장사나 참외장사를 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아방리 마을 남자들은 도림동으로 나가 나무를 팔았다. 나무가 잘 안 팔리는 경우에는 도림동에서 더 안쪽 깊숙이 들어가기도 했다. 그렇게 고생하며 나무 한 짐 팔아야 쌀 한 됫박밖에 되지 않았다. 아침나절에 나무를 팔려면 아방리[능말]에서 대개 새벽 2시쯤 출발해야 했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지금 구로역 근처에 나무시장이 있었다. 강진근 씨는 그곳까지 새벽 어두운 밤길에 나뭇짐 가득한 지게를 지고 3시간을 걸어서 갔다. 혹시 비라도 오고 나면 진흙길을 가야 한다. 진흙길에서 발이라도 잘못 디디게 되면 넘어져서 나뭇짐이 엎어진다. 나뭇짐에 흙이 묻지 않고 동그랗게 모양이 나야 제값을 받고 파는데 이렇게 넘어져서 흙이라도 묻게 되면 시장에 가도 가격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어렵게 살기는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들은 참외 농사를 지어 큰 광주리에 참외를 이고서 30리 길을 걸어가서 영등포에 팔러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여름에 쌀밥은 먹어 보지 못했다. 다들 그렇게 어렵게 살았다.
[처갓집 마당에서 구식 혼례를 치르다]
강진근 씨는 스물여섯 살 때 가학리에 사는 설순애 씨와 혼인했다. 강진근 씨가 스물다섯 살 되던 해에 일가 형님이 어머니께 얘기를 하여 중매를 섰다. 형님과 처남이 같은 직장에 다녔는데, 하루는 처남 될 사람이 안산 옥기섬에 자기 이모가 살고 있다면서 그곳으로 회를 먹으러 가자고 제안을 했다. 강진근 씨는 아무것도 모르고 직장 동료들과 함께 따라가서 전어회를 먹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선보는 자리였다고 했다. 혼담이 잘 성사되어서 선을 본 이듬해인 1963년 음력 11월 30일에 혼인을 하게 되었다. 혼례식 전날 친구들이 신부집에 함을 지고 갔는데, 함 안에는 신랑의 생년월일과 시를 쓴 사주단자, 그리고 채단이라고 해서 신부가 입을 옷감을 넣었다.
혼례식 당일 강진근 씨는 가학리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친구 하나가 영등포에서 시발택시 운전사를 하고 있어서 그 친구한테 특별히 부탁을 했다. 혼례식에 어머니는 가시지 않고 친구들하고만 갔던 걸로 기억한다. 혼례는 처갓집 마당에서 구식으로 하였다. 신랑과 신부는 사모관대와 원삼 족두리를 썼는데, 그것은 금천강씨 종갓집에서 빌려 온 것이었다. 당시 금천강씨 종갓집에서는 원삼 족두리와 사모관대를 나무상자에 잘 보관하고 있다가 강씨 일가가 결혼할 때 빌려 주곤 했다.
혼례를 치른 뒤 강진근 씨는 신부와 함께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먼저 조상에게 차례를 올리고 난 후 신부와 함께 일가친척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드렸다. 집집마다 다 다닌 것은 아니고 나이 많은 어른들이 계시는 집들만 찾아다녔다. 그리고 2~3일 정도가 지난 후 처갓집으로 재행을 가서 자고 돌아왔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