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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근과 광명시청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C020201
지역 경기도 광명시 철산3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민성혜

빨간 벽돌로 된 집과 담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대도시의 주택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김수근이 설계한 불광동성당이나 대학로에 있는 문예회관 등은 붉은 벽돌 건축물로서 일반에게 친숙한 재료로 건축되었는데, 이렇듯 붉은 벽돌이 건축의 일반적인 재료가 된 데에는 김수근이라는 건축가의 영향이 컸다.

김수근이 1960년 남산국회의사당 건축 현상 설계에 1등으로 당선되면서 우리나라 건축계에 전면적으로 등장한 이후 1986년 세상을 뜨기 전까지, 김수근이 이끈 공간연구소의 220여 작품 중엔 광명시청사광명시민회관도 있다. 그리고 광명시의 청사는 붉은 벽돌로 건축된 우리나라 유일의 관공서 건물이다.

[민원 봉사실을 전면에 둔 공공 기관 건축의 모범]

1980년대는 관공서의 신축을 제한하고 청사의 규모에 대해 엄격히 규제하는 관례가 있었다. 그런데도 광명시청사는 당시의 관례에도 맞지 않는 웅장한 규모의 붉은 벽돌 건축물로 지어졌다. 외관은 관공서라기보다 예술 회관에 가까운 형태를 지니고 있다. 준공 당시 본관 정면에는 넓은 광장이 있었다. 최근 현대식으로 지어진 관공서에는 로비가 흔하지만, 경직된 1980년대 관공서인 광명시청사에는 파격적으로 1층에서 2층까지 이어진 로비를 배치했다. 또한 1층 입구에는 곧바로 민원 봉사실을 배치하여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라 할 수 있는 시민과 밀착되는 행정을 상징하는 설계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창조적이고 앞선 개념은 1996년 광명시가 국내 최초로 종합 민원국을 가동하고, 독립적인 공간으로 종합 민원실을 마련해 주민과 밀착된 행정 서비스를 펼치는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어졌다.

[광명시청사의 건축적 특징]

광명시청 건물은 광명시 개발의 중심지인 시청사를 핵으로 커뮤니티센터(Community Center)를 설립하여 장차 시의 발전에 구심적인 역할을 담당케 한다는 의미와 함께, 신도시인 광명시가 현재까지 무질서하게 개발되어 온 것을 질서 있는 광명시의 미래상을 표현할 수 있는 자체적인 건축 어휘의 사용으로 상징성을 부여하도록 하였다. 휴먼 스케일(Humam Scale)의 내부 공간 구성과 여기에 인간 척도의 재료인 벽돌이 사용된 장식적인 띠가 둘러진 열주의 수직적인 표현과 우리 전래 탑 형태의 수평적인 표현이 그것이다. 또한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큰 스케일의 건물이 가질 수 있는 중압감을 배제하기 위해 기둥이나 벽에 디테일한 요소를 부여함으로써 중압감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그런데 청사의 웅장한 겉모습과 달리, 청사에서 생활하는 일선 공무원들은 공간 활용이 비효율적이라고 불평할 정도로 내부 공간이 상당히 좁은 편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당시 광명시청사 건설 현장 소장으로 근무했던 이동근[1950년생] 씨는, “당시 도청이나 시청 등 관공서 건물에 대한 층수와 규모를 규제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어서 외양은 웅장해도 연건평은 관례에 맞추기 위해 중앙에 넓고 높은 로비를 2층까지 배치했고, 3층도 야외 공간으로 조성되어 사무실이 로비를 중심으로 외곽으로 둘러 싼 형태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결국 광명시청사 본관은 비좁은 청사의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측면의 빈공간에 증축을 하였고, 2010년 현재는 준공 당시의 모습과 다소 차이가 있다.

청사의 건축에 사용된 재료는 외부 콘크리트 면에 기둥은 적벽돌, 파라페트는 페인트를 이용했다. 내부의 중앙홀은 국내산 화광석, 사무실 바닥은 비닐계 타일, 천정은 아스칼택스, 벽체는 미장 페인트로 칠하는 등 보편적인 재료를 사용했다. 적벽돌에 둥근 기둥, 장방형의 본관은 고급스럽고 웅장한 형태였으나, 실제로 사용된 외장재인 적벽돌이나 내장재는 사치스럽지 않은 보통의 재료였던 것이다.

[광명시청사 공사 과정을 회상하며]

광명시청사는 1983년 8월에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착수했으며 1984년 7월 2일 준공식을 가졌다. 설계는 공간연구소[현 (주)공간그룹], 시공사는 럭키개발[현 GS건설]이었다. 광명시청사 본관 준공 이후 1985년 제1별관을 신축했고, 1986년에는 광명시민회관이 신축에 들어가 4년 만에 개관하였다.

광명시청사광명시민회관 건설 당시 현장 소장이었던 이동근 씨는, 시청사는 철산리 산 중턱에 위치하였고, 묘지였던 야산은 바위가 많아 소규모 화약 발파 작업으로 땅을 파고 기초 공사를 시작했다고 공사 과정을 회상하였다. 그리고 “본관 건물은 벽돌을 쌓은 둥근 기둥이 있고, 파라페트가 한식 형태라 합판 거푸집으로 틀을 만들기에는 경험이 없어 어려웠던 점이 많았다.

공사 기간도 1년으로 짧았지만, 동절기 2개월을 빼면 10개월 만에 완공해야 했기 때문에 현장 생활도 무척 힘들고 어려웠다.”면서 “설계자인 공간연구소의 김수근 대표는 당시 한국 건축계를 이끌어 가는 분들 중 한 사람이라 대단히 자기 작품에 심혈을 기울었던 관계로 공사 변경이 많았고, 철저한 설계 감독으로 공사가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이동근 소장은 광명시청사의 의미를 “1980년 초라는 안팎의 상황은 많은 예산을 들여서 관공서를 신축하는 데 유리한 조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광명시청사 공사는 대단히 획기적인 디자인의 설계였으며, 시민과 밀착된 구조의 미래 지향적인 설계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화제의 건축물이었던 만큼 공사 기간 동안 많은 인사들이 견학하고 방문해서, 소장으로서는 공사 연구보다 안내하고 설명하는 데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회상했다.

[광명출장소와 옛 광명시청이 있던 곳은 어디인가요?]

광명출장소는 현재 광명2동에 소재한 광명옹달샘도서관 자리였다. 그 후 그곳이 보건소가 되면서 2010년 현재 광명6동 새마을시장 옆의 국민은행 광명점이 있는 자리로 옮겼는데, 광명출장소가 광명시로 승격되면서 시청사가 된 것이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첫 시청사 자리는 웅덩이와 같은 습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더 오래 살았던 토박이들의 말에 따르면, 원래 습지가 아니라 홍수가 나면 저지대라 물이 고이게 되는데, 광명아파트[현 광명4동 한진아파트]를 지으면서 지대를 높이자 물 빠질 곳이 없어 그대로 습지 형태가 된 것이라고 한다. 그 터를 소유주인 최승권 씨가 희사(喜捨)하여 웅덩이를 다지고 옛 광명출장소를 짓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 건물은 1981년 개청한 후 시청사로 쓰였으나, 공간이 비좁아 길 건너 예식장 자리에 가건물을 짓고 업무를 하다가, 1984년 신청사를 완공하여 옮기게 된 것이다.

1984년 철산동의 시청사가 건설된 후 광명6동 구청사에서 신청사로 이사 올 당시를 기억하는 공무원들은, 특별한 이사 대책이 없어서 각 과별로 이삿짐을 챙겨서 리어카와 차량에 나눠 싣고 석고개를 넘어가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전했다.

[정보제공]

  • •  이동근(남, 1950년생, 당시 광명시청사 건설 현장 소장)
  • •  장기상(남, 1941년생, 전 광명우체국 집배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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