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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공단 노동자의 친구에서 지역 사회운동단체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C030202
지역 경기도 광명시 철산4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민성혜

[노수녀님의 집에서 철산동만남의 집으로]

광명만남의 집은 1986년 노은혜 수녀가 철산4동 도덕산 자락 달동네[옛 진주아파트 뒤쪽 주택가, 현 브라운스톤아파트 자리]에 구로공단 노동자의 쉼터인 ‘노수녀님의 집’을 마련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철산동하안동이 인접한 안양천 뚝방 근처와 도덕산 자락에는 무허가 주택이 많았다. 값싼 집세 덕에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주거 공간으로 많이 이용되는 곳이었지만, 노동자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나 노동 단체는 전무한 실정이었다.

노은혜 수녀는 쉼터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 온 노동자들과 성서 공부를 시작했고, 1987년경부터는 철산성당의 도움을 받아 공개 프로그램을 계획하게 되면서 조직 노동자와 만나게 되었다. 당시 프로그램의 내용은 ‘노동자 교양 교실’, ‘풍물’, ‘탈춤반’, ‘노동자 소모임 구성 교육 전개’, ‘민주 노조 추진 사업’, ‘교회 쇄신 사업’ 등이었다.

노수녀님의 집은 1991년 철산2단지 주공아파트로 이사한 후 ‘철산동만남의 집’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철산주공아파트 시절의 철산동만남의 집은 아파트로 젊은이들이 몰려다닌다는 주민들의 눈총과 비싼 임대료 문제로 노동자 교육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결국 철산동만남의 집은 1993년 6월 철산4동 성화빌딩으로 이사하였다. 그런데 아파트 주민과의 갈등은 오히려 철산동만남의 집이 지역 문제로 관심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노동자 위주의 프로그램으로부터 지역 주민과 결합한 지역 운동과 환경 운동으로 전환하기 위한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

[새로운 모색-지역 주민을 위한 복지 사업에 뛰어들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구로공단 지역이 침체되자 노동자의 숫자가 감소했고, 이에 따라 노동 운동 위주의 프로그램 운영이 점점 어렵게 되었다. 철산동만남의 집은 자연스럽게 달동네인 철산4동 지역의 실정에 맞는 활동으로 변화를 모색하게 되었다. 철산동만남의 집이 속하게 된 철산4동 지역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였던 철산3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제적·문화적 혜택이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변화의 모색은 지역의 요구이기도 했다. 1992년부터 철산동만남의 집에서는 실무자와 대학생 자원 봉사자들이 중심이 되어 지역의 맞벌이 부모의 자녀를 대상으로 한 ‘푸른공부방’,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지역주민교양교실[한글, 한문, 영어 교육]’, 저공해 비누를 생산하는 ‘푸른물공동체’ 활동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철산동만남의 집은 노동자 센터에서 ‘주민 자치’와 ‘지역 복지 공동체’로 변모하면서 1997년 주민과 함께하는 ‘광명만남의 집’으로 이름을 바꾸고 지역 주민을 위한 구체적인 사업을 시작하였다.

[주민 자치를 위한 시민 사회 단체로 거듭나다]

광명만남의 집은 노동자를 위한 쉼터로 시작했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시민 사회단체 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지역 주민을 위해 민사·형사, 임대차, 채권, 채무, 생활 법률, 임금 체불, 산업 재해 등의 문제를 상담해주는 ‘수요무료법류상담’은 광명만남의 집의 주요 사업 중 하나이다.

2000년 들어 광명만남의 집광명시민단체협의회푸른광명21실천협의회 실천 사업과 가톨릭 노동 사목과 같은 지역 시민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지역 아동 센터 사업을 시작하여 푸른공부방을 방과후교실 ‘꿈터’로 바꾸고 전국지역공부방협의회의 활동도 하고 있다. 광명만남의 집은 2003년 철산4동 드림빌딩 4층으로 이사하였다. 2009년 2월에는 청소년 공부방 사업을 시작하여 8월 22일 개소식을 열고, 아동에 비해 지원이 열악한 지역 청소년들을 위한 사업을 시작하였다.

1997년 노은혜 수녀가 의료 선교를 위해 중국으로 떠난 후, 광명만남의 집에서는 후원금 등과 관련한 재정을 투명하게 관리하고 공익 활동의 대표성을 확보하기 위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유설 신부를 광명만남의 집 대표로 추대하였다. 이후 하유설 신부는 광명만남의 집의 대표로서 대외적인 활동과 미국메리놀수도회를 통해 광명만남의 집으로 보내지는 후원금을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광명만남의 집은 후원자들의 믿음과 후원, 자원 봉사자들의 정성으로 지역 주민과 함께 지역 아동·청소년을 위한 센터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광명만남의 집 대표, 노은혜 수녀와 하유설 신부]

파란 눈의 한국인으로 알려진 노은혜 수녀는 1928년 미국 위스콘신 주 밀워키에서 태어나 메리놀 수도회에 입회했다. 수도회에서 간호학과 수련을 마치고, 10년간 스리랑카에서 간호 선교 활동을 하면서 제3세계의 비참한 현실에 접하게 되었다.

노은혜 수녀는 1964년 한국에 와서 1966년 부산메리놀간호전문대학 학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1972년 평교수로 돌아와 빈곤한 농촌 의료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지역 의료에 관심을 갖고 의료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때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를 통해 현장 노동자들을 접하고 노동 현실을 알아 가면서 다양한 활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노은혜 수녀는 메리놀 본부로 발령받아 3년간 메리놀 공동체 병원에서 활동하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부천과 부평, 성남 등 가톨릭노동사목센터를 다니며 노동과 관계된 일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중 1984년 4월 철산성당 장덕호 신부로부터 구로공단 노동자를 위해 일해 달라는 제안을 받고, 광명시 철산4동의 달동네에 집을 얻고 ‘노수녀님의 집’을 개원하면서 노동 사목을 시작하였다.

현재 노은혜 수녀는 1997년 2월 칠순의 나이에 중국 길림성 장춘 부근으로 의료 선교의 길을 떠나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2005년 중국 당국에 선교 활동이 적발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유설[요셉] 신부는 1945년 보스턴에서 태어나 철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1968년 미국에서 흑인 인권 운동과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 참여했고, ‘평화봉사단’ 활동을 하면서 한국에 지원하여 영어 교사로 오게 되었다. 임기 2년의 일정이었으나, 한국 문화와 정이 좋아서 6년을 더 머무르며 넝마주의와 구두닦이, 고아들을 위한 봉사 활동을 하면서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975년 미국외방선교회[현 메리놀 외방전교회 한국지부]에 입회하여 신학 공부를 하던 중, 1978~1979년 한국으로 실습 선교를 위해 경기도 성남에 왔다. 하유설 신부는 미국인 고요한 신부와 야간 학교를 운영하며 가내 공업에 종사하는 10대 여성 노동자들이 처한 저임금 장기 근로 상황과 학생 운동을 만나면서 가난한 사람의 삶에 눈을 뜨게 되었고,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켜보게 되었다.

1980년 5월 17일 미국에서 신부 서품을 받고 다시 성남으로 돌아온 하유설 신부는 이후 신부와 수녀, 평신도와 함께 가난한 사람과 생활하며 문턱이 높지 않은 교회를 위한 노동 사목, 도시 빈민 사목, 의료 사목, 영적 사목을 하였다. 노은혜 수녀와는 가톨릭노동사목협의회 활동 중에 만나게 되었는데, 노은혜 수녀가 중국으로 의료 선교를 떠나기 전 광명만남의 집을 부탁하면서 광명만남의 집과 인연이 되었다.

[정보제공]

  • •  하유설(남, 1945년생, 광명만남의 집 대표)
  • •  조미수(여, 1963년생, 전 광명만남의집 활동가)
  • •  임삼례(여, 1964년생, 광명만남의 집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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