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12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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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永東 |
영어공식명칭 | Jeon Yeongdo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곽현희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2002년 - 「전영동」 심의석으로부터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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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3년 - 「전영동」 『경산의 전설과 민담』에 수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5년 - 「전영동」 『경산 지방의 설화문학연구』에 수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9년 - 「전영동」 『경산문화대사전』에 수록 |
관련 지명 | 전영동 사당 -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 |
채록지 |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흥산리 |
성격 | 전설|무속 신화 |
주요 등장 인물 | 전영동 |
모티프 유형 | 인물담|지명유래담 |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에 있는 한 사당에 전해지는 전영동에 대한 이야기.
[개설]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에는 전영동이라는 사람을 모시는 한 사당이 있다. 전영동은 고려 공민왕 때 실존했던 인물로, 기이한 출생부터 시작해 살아있는 동안 비범하고 신이한 행적들을 보여주다가 끝에는 풍신(風神)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송백리 주민들은 전영동의 사당을 짓고 매년 정월 보름날 새벽에 큰 무를 제단에 올려놓고 제를 올렸다. 그 후 일제 강점기 말엽에 중단되었던 것을 2005년에 제당을 다시 복원해 놓았다.
[채록/수집 상황]
「전영동」 설화는 2002년 심의석[남, 당시 83세]에 의해 채록되었으며, 2003년 경산문화원에서 간행한 『경산의 전설과 민담』에 설화의 내용이 수록되었다. 또한 2005년 간행한 이동근·김종국의 『경산 지방의 설화문학연구』와 2009년 경산시립박물관에서 발간한 『경산문화대사전』에도 이와 같은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내용]
고려 공민왕 때, 남천면 하도리에서 전영동이라는 사람이 태어났다. 신기하게도 전영동이 태어난 3년 동안, 부근 10리 안에 있는 초목들에 풀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고 한다. 전영동은 커서 경산현리가 되었는데, 일을 하기 위해 출근과 퇴근을 할 때 호랑이를 타고 다녔다. 또한 살아있는 동안 단 한 번도 익힌 음식을 먹지 않았다. 오로지 무즙만 먹고 살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경주부사가 민정을 살피려고 돌아다니던 중에 어느 집에서 곡성이 나고 있었다. 부사가 그 집에 들어가 보니 노인이 아들 셋의 시체를 늘어놓고 울고 있었다. 노인은 울면서 아들 셋 모두를 염라대왕이 잡아갔다며 부사에게 말했다. 부사가 노인을 딱하게 여겨 염라대왕에게 상소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부사는 누구에게 상소문을 전하라고 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그때, 부사는 전영동이 재주가 많다는 소문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이에 부사가 전영동을 불러 상소문을 염라대왕에게 전하게 했다. 전영동은 부사에게 좋은 말 한 필을 달라고 하고는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일주일 후에 전영동이 깨어나 부사에게 말을 전했다. 노인의 집이 예전에 포목장사를 했는데, 돈만 받아 챙기고 손님들을 죽였다고 한다. 그렇게 죽인 손님들의 숫자가 셋이고, 죽인 후에 집 뒤에 묻었다. 그 때문에 염라대왕이 노인의 아들 셋을 거두었다는 것이었다. 부사가 그 말을 듣고 전영동이 알려주는 데로 가서 땅을 파보니 정말로 손님들의 해골이 나왔다. 그 일이 있은 후, 염라대왕이 가만 생각해보니 자신에게 상소를 올린 것이 괘씸하여, 이를 어떻게 처리할까 하다가 전영동만 없으면 상소를 올릴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염라대왕은 목숨이 많이 남은 전영동을 이른 나이에 저승으로 잡아갔다.
이렇게 죽게 된 전영동의 혼을 달래기 위해 사람들은 지금의 남천면 구일리 입구에 당집을 지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루는 동래부사가 전영동의 사당이 있는 길을 지나다가 갑자기 말이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일이 일어났다. 마부가 부사에게 설명하기를, 전영동 사당이 있는 길에서 누가 말을 타고 가면 말굽이 붙으니 내려서 걸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부사가 이 길은 높으신 분들이 오고 가는 길인데 매번 걸어 다닐 수는 없는 길이라며, 연을 하나 만들어 날렸다. 그러자 바람이 불어와 지금의 송백리에 있는 나무에 붙었다. 이때부터 연이 붙은 자리에 사당을 옮겨 전영동의 위패를 모셨다. 또한 전영동은 죽은 후 바람을 제압하는 풍신으로 여겨져 매해 마을 사람들이 사당에 모여 제사를 지냈다. 무 밭에 큰 무가 올라오는 집이 그 해에 제사를 주관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전영동」 설화의 주요 모티프는 ‘기이한 출생’, ‘저승행’, ‘풍신’ 등으로, 전영동이라는 인물이 풍신이 되기까지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신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속 신화로 볼 수 있다. 「전영동」 설화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전영동이 저승에 가게 되는 부분이다. 아들이 죽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재주가 뛰어난 이를 저승에 보내 염라대왕을 잡아오게 하거나 만나게 하는 설화로는 충청북도 보은군에서 전승되는 「영동이 유래담」, 전라북도의 「흥덕현감설화」가 있다. 또한 ‘강림도령형’ 무가라 불리는 서사무가들에도 이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다만, 이들 설화에서는 설화의 주인공이 저승사자가 되는 반면, 「전영동」 설화에서는 풍신이 된다는 점이 다르다. 「전영동」 설화에 이와 같은 내용이 포함된 것은, 「전영동」 설화가 구전되는 와중에 ‘강림도령형’의 서사무가나 신의 내력을 설명하는 무속 신화들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